‘경제발전’만을 향해 달리던 70~80년대 우리 산업 역사속에 발생한 충격사건...
전태일 분신과 김경숙 투신! 이 두 사건도 ‘안전중시’를 무시한 결과로 빚어진 것
노동은 신성한 것이고, 노동자의 피와 땀은 산업 역사의 강물이었으며 국력신장에 최고 양질의 비료가 되었다. 이른바 한강의 기적이니 세계 10위권의 경제 선진국이란 말도 노동자의 피와 땀이 없었다면 결코 이룩될 수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대한산업안전협회’라는 컨설팅 기관이 없었다면 노동자의 건강과 생명을 빼앗아 가는 산업재해의 폐해는 실로 감당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돌이켜보면 우리 대한민국은 불행하게도 세계적으로 ‘노동재해 왕국’이라는 오명을 가졌다. 한국의 경제성장은 산재를 대가로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 예로 1980년대 스테인리스 식기류를 프레스작업으로 제조하던 인천의 경동산업은 산재가 많아 한 달이면 몇 가마니의 잘린 손가락이 나온다고 할 정도였다. 겉으로 드러난 산재보다 12배나 되는 노동재해를 ‘산재’가 아닌 ‘공상’으로 처리하기도 했다. 실제 노동재해의 규모는 공식 발표보다 최소 4~5배되는 셈이다.
현재 한국은 산업구조가 제조 건설업이 20%, 서비스업이 70% 정도의 수준으로 이미 미국과 비슷하다. 제조업에 위험성이 높은 업종이 많지만 노동재해가 많은 이유는 산업구조 때문만은 아니다. 사회나 정부가 산업재해 문제에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산업재해의 위험성이 중소기업으로 이전했으며, 그 피해 역시 사회적 약자인 비정규직 노동자와 이주노동자에게 전가한 예가 많았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래서 산업안전 컨설팅업무는 더 없이 소중하였다.
한국에서 산업화가 진행된 뒤 지난 1980년대에 노동자의 건강문제가 중요 쟁점으로 떠오르기 시작한 것은 전태일 사건 이후이다. 산업안전보건법도 1981년이 되어서야 제정했다. 그러나 사회복지 제도가 미비한 상태에서 산재 때문에 노동현장에서 퇴출당한 산재노동자들은 대부분 비정규직으로 공사판 등을 전전하며 생활고 때문에 가정까지 파괴당한 경우가 허다하였다. 그것은 일부 기업경영자들이 오로지 돈벌이에만 치중한 결과였으며 또한 목숨을 아끼지 않고 일해 온 노동자들의 안전부주의도 한 몫을 한 것이 아닌가싶다.
그래도 요행히 50년 전(1964년) 박정희공화당정부 때 대한산업안전협회라는 단체조직이 탄생하였으며 본 협회는 기업이나 노동자들에게는 어쩌면 보이지 않은 ‘엄마의 손’과 같은 역할을 해왔다. 어느 시인은 이런 글을 쓴 적이 있다.
‘신(神)은 모든 곳에 있을 수 없어 ‘엄마’라는 존재를 대신 만들어 두었다.’
그렇듯 우리의 산업현장 구석구석에는 언제나 대한산업안전협회의 가족들이 때론 ‘엄마의 손’이 되었고 산불감시원이 되었고 때론 비올 때 우산 역이 되었었다. 또한 전쟁터에서의 군의관이나 종군간호병 같은 힘든 역할도 묵묵히 감당했다고 봐야 할 것 같다.
하지만 안전협회가 감당하기 어려웠던 사건, 사고들도 부지기수였고 예방과 치유책에는 예산문제 등 한계도 많았다. 아무리 안전교육을 시켜도 ‘마이동풍’이 되기도 하였으며 ‘사후약방문’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협회는 유년기와 청년기를 거치면서 온갖 난제들을 스스로 해결하고 우수인력의 양성으로 이제 우리 경제성장의 공로에 한 몫을 차지하였고 주간 ‘안전저널’, 월간 ‘안전기술’지 등 정기 간행물 발간으로 협회의 존재가치를 대내외적으로 홍보하고 짜임새 있는 안전교육 프로그램 등으로 국가와 국민 그리고 기업안전의 책임과 의무에 최선을 다해왔다.
그런 일련의 사례들은 본 책자(50년사 본문) 내용에 상세히 기술될 것임으로 이 지면엔 생략하겠다만 아무튼 대한산업안전협회 50년 역사 속에는 세상에 잘 드러나진 않지만 우여곡절도 많았고 성과도 컸음을 스스로 자평(自評)하는 것이다.
한편 지난 역사를 돌이켜 보면 좀 더 일찍이 이런 안전 컨설팅기관이 있었다면 산업현장에서 땀 흘리며 일하다 쓰러진 수많은 아까운 인재(人材)들을 ‘시대의 바람꽃’으로 떨어지지 않도록 했으리란 아쉽고 안타까운 생각도 금 할 수가 없다.
그러다보니 빼놓을 수가 없는 스토리가 두 개 있다. 이미 아득한 과거사가 되었지만 본 협회가 탄생한지 6년 후, 그러니까 사람으로 치면 겨우 6살 되던 해 발생했던 ‘전태일 열사 분신자살사건’ 그리고 그로부터 십여 년 후 ‘김경숙 열사 투신자살 사건’만 예를 들어 보겠다.
그들 두 노동열사들의 아까운 생명은 산업안전에 따른 환경부실이 그런 비극을 초래했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일찍이 정부나 기업이 노동자들에 대한 깊은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열악한 작업환경을 개선해주고 저임금과 중노동에 시달리지 않도록 신경을 썼더라면 꽃 같은 젊은 청춘 남녀 노동자대표들이 왜 그런 참담한 최후를 맞이했을까를 우리는 신중히 생각해야 할 것이다.
지금 60대 중년 이상인 국민들은 대충 기억을 하고 있겠지만 앞의 두 사건은 얼마든지 피해갈 수 있었던 일이었다. 물론 산업안전협회의 업무와 직접적인 관련은 없지만 30~40년 전에 있었던 불행했던 이런 사건이 다시는 발생하지 않도록, 그야말로 산업의 안전정신이 확립되어야 한다는 취지에서 필자는 당시의 상황을 다시 한 번 회상해 보았다. 과거 없는 미래가 없기 때문이며, 따라서 산업안전과 노동자들의 피와 땀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강조하고 싶어서다. 그리고 이 두 사건은 우리나라 역사를 뒤흔든 사건이기에 더욱 그렇다.
먼저, 전태일 열사 분신자살 사건 경우부터 살펴보자. (필자는 당시 언론사 일선 취재현장에 있었기 때문에 당시의 상황을 일반인보다 좀 더 소상히 알고 있고 해묵은 기자수첩에 적혀있는 메모와 신문에 보도한 내용을 간추렸음을 밝혀둔다.)
먼저 전태일! 1970년 11월 13일 평화시장 앞에서 22살의 청년 노동자 전태일은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일요일은 쉬게 하라!”고 절규하며 분신했다. 당시 전태일은 이 땅의 노동자가 인간으로서 살아갈 수 없는 참혹한 세상을 고발하고 노동자도 인간임을 선언하기 위해 자신을 불사를 수밖에 없었다. ‘노동자’라는 말만 꺼내도 불순세력으로 몰릴까 봐 두려움에 숨죽여야 했던 시대에 마침내 한 점의 불꽃이 되었다. 전태일의 죽음이 사회에 던져준 영향은 매우 컸다.
노동자와 민중에게 준 영향을 말할 것도 없고 보수 세력마저 노동자 문제를 현실적인 문제로 인식했다. 노동자 문제를 외면하던 언론도 전태일 열사 분신 이후에는 노동자들의 참상을 폭로하고 ‘노동정책의 일대 전환’을 촉구했다. 동아일보 1971년 신년호에서는 6·25가 1950년대를 상징하고 4·19가 1960년대를 상징하듯, 전태일의 죽음은 1970년대 한국의 노동 문제를 상징하는 가장 뜻깊은 사건이라고 평가했다.
1971년 대선에서 각 후보들은 기자회견에서 “전태일 정신의 구현”을 선거 공약으로 내놓고, 대국민 설득을 했다. 결론적으로 전태일 분신사건은 정치권까지 노동자의 존재이유를 부각시켰고 새삼 깨우치게 한 엄청난 충격파였다.
다음은 김경숙 열사를 죽음으로 몰고 간 YH 노동자 투쟁이다. 1960년대 이후 한국 자본주의 발전 과정에서 누적되어 온 사회적 모순이 첨예한 형태로 폭발한 것이었고, 결국은 공화당정부를 무너뜨리는 데 결정적 계기를 제공했다.
YH 사건에 이어 정부는 노조지부장 등 간부와 종교인, 재야인사 등을 구속했고, 10월에는 부산, 마산 지역의 노동자와 학생들의 대대적인 항쟁으로 이어졌다. 전태일 열사의 희생이 1970년대 초에 한국노동운동의 장을 열었다면 80년대에 와서 그 막을 내린 것은 김경숙 열사였다고 우리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이 두 사건의 특이점과 유사점은 ‘쌀밥’이 실컷 먹고 싶어 울어야했던 시절, 가난한 집안 아들과 딸들이 나 자신의 행복과 안일보다는 ‘공돌이’ ‘공순이’소리를 들어가며 우리나라 경제부흥 초기에 대표적인 ‘희생양’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지금 생각하면 실로 한 없이 안타깝고 불행하기 짝이 없는 사건이다. 반복되는 이야기지만 좀 더 일찍이 ‘산업안전’ 정신이 지금만큼이라도 뿌리를 내렸다면 안전무방비 상태로 빚어졌던 이런 슬픈 일은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에서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산업현장의 모든 이들과 미래 산업 용사들은 이 두 사람의 살신성인 정신을 결코 잊지말아야 한다. 특히 김경숙 열사가 세상을 떠나기 얼마 전에 손수 써서 남긴 수기(手記) 한편은 그냥 수기라기보다, 그 시대 산업안전 부실현장에 대한 고발장 같고 우리 경제 발전의 그늘에서 절규하던 한 여공의 신음소리 같은 슬프고 아픈 울림이라 이 지면에 꼭 새겨두고 싶다.
「“이 세상에 태어났을 때 누구나 티 없이 맑고 다 깨끗하다. 그러나 집안환경으로 차이가 생긴다. 내가 8세 때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의 날품팔이로 생계를 이었다. 어머니의 수고로 시골 초등학교를 졸업했다. 졸업하기 직전 겨울방학 때부터 공장에 다닌 나 자신은 우리 가정이 잘 살 수 있다면 무슨 일이라도 해서 돈을 벌겠다고 결심했다. 내가 배우지 못한 공부를 동생에게 가르쳐서 성공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나의 간절한 소원이다.”」
이 얼마나 안타까운 생존의 몸부림이며 눈물 젖은 절규의 글인가? 창립 50주년을 맞이한 우리 대한산업안전협회는 보다 적극적인 자세로 단 한 건의 사고라도 더 예방하고 줄여가며 아직은 이 나라 척박한 산업전선에 갑(甲)과 을(乙)의 중재자가 되어 ‘안전’이란 꽃이 피어날 때까지 좋은 토양이 되도록 가꾸어 나가자는 것이다.
최근에 발생한 ‘세월호’ 침몰사건도 전부‘안전불감증’이 빚은 대참사였다, 뿐만 아니라 산업시설 전반에 ‘안전불감증’이 숨어있고 언제 어떤 사고가 발생할지도 모를 작업 환경의 위험요소를 안고 있는 현장이 없지 않으리라 생각된다. 그러나 노·사·정(勞·使·政)이 서로 협조하고 노력하면 또한 우리 협회가 최선을 다한다면 어려운 문제는 아니라본다.
다소 미비한 점도 없지 않으나 50년의 대한민국 산업안전역사를 500쪽 안팎되는 한 권의 책으로 묶어 내는 일은 결코 쉽지 않음을 독자 제현들께서 이해하여 주시리라 믿으며 지나간 50년의 발자취가 담긴 ‘KISA 50年史’가 광활한 미래를 비추어주는 안전의 등불이 되고 우리 스스로를 비추어 보는 좋은 거울이 되었으면 하고 본 특집기사의 마침표를 찍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