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인간에게는 무엇보다 소중한 양심(良心)이란 게 있고 또 우리는 그것을 꼭 지켜야 한다. 그래야 세상 살 맛이 나는 것이다. 양심이란 단어의 사전적 의미는? ‘자신의 행위에 대하여 옳고 그름, 그리고 선과 악의 판단을 내리는 도덕적 의식’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그런데 최근에 있었던 그리고 지금도 현재진행형으로 진실게임이 벌어지고 있는 이른바 ‘대리기사 폭행사건’을 보면서 우리는 많은 것을 느끼고 있다.
힘 있고 돈 있는 사람은 힘없고 불쌍한 대리기사를 다치게 하고 온갖 거짓으로 저렇게 인격을 짓밟고 전국민들의 분노심을 불러 일으키고 있어도 괜찮다는건가? 하는 지경에 도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미 세상이 다 아는 일이지만 그 사건은 한 여성 국회의원께서 세월호 유가족(단원고) 대표자들과 한밤중까지 술자리를 벌이면서 부른 대리기사와의 사소한 언쟁에서 시작된 사건이다. 필자는 그 사건을 TV와 신문을 통해서 보았고 사건현장에는 없었지만 젊은 날 사회부기자로 현장취재를 많이 한 경험으로 비추어 볼 때 거두절미하고 그 여성 국회의원의 ‘잘못’임을 여실히 느끼고 있다.
그냥 단순한 ‘약자동정’이 아니라 지나가는 개가 들어도 웃을 거짓말을 마구 해대고 4주 중상피해를 입고 병원에 입원중인 그 피해자를 열흘이 넘도록 한번도 찾아가서 사과하지 않는 그 국회의원의 양심에 심한 경멸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지나가던 행인들도 모두가 이구동성으로 그 국회의원의 잘못을 지적하고 성토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당사자는 오만방자의 극치를 보였다. 마치 그녀의 양심 한 복판에 까만 털이 소복난 것은 아닐까...싶은 환상도 해 보았다. 반면 사업에 실패하고 가족들과도 생이별하고 부천의 어느 단칸 셋방에 혼자 살면서 하룻밤에 몇 만원의 생활비를 벌기 위해 잠도 못자고 대리운전으로 생계를 이어가는 그 기사는 정말이지 바른 양심, 깨끗한 양심을 지닌 ‘순한 양’같이 보인다.
사건 속보 뉴스가 계속 터져 나가자 그를 돕고자 하는 온정의 손길들이 1주일 만에 3500만원이란 적지 않은 성금을 모아 병원비로 보태 쓰라고 격려를 하였으나 그 양심 바른 대리기사는 더 이상은 부담스럽다고 아름다운 사양을 했다니 콧날이 찡해오기도 했다.
비록 가난하고 어렵게 살아도 분에 넘치는 큰 동정은 받지 않겠다는 그 양심은 그냥 양심이 아니라 이 삭막하고 험악스런 사회의 들판에 외롭게 피어난 한 떨기 향기로운 꽃 같이 보이기 때문이다. 그 와중에 필자는 한 여대생(서울대 1학년 박형서 양)이 그 사건과 관련하여 어느 지면에 기고한 칼럼을 읽고 참으로 감동하였기에 그 글을 읽지 못했을 사람들과 그 독후감을 공유하고 싶어 몇 줄만 옮겨본다.
- 유가족 대표들을 싸움판으로 끌어들인 그 국회의원은 대리기사에게 이렇게 말했어야 옳은 것이다. “기사님, 아이들을 잃고 가눌 길 없는 슬픔으로 실수하신 분들입니다. 더구나 저 때문에 시작된 일입니다. 제가 기사님께 잘못을 했으니 유족들은 용서해주시고 이해해 주세요. 국회의원인 제 책임입니다. 죄송합니다”라고…. 그랬더라면 그 대리기사님이 어떻게 얘기했을까? 나는 그분이 당연히 그 사과를 받아들였을 것이라고 믿는다. 그분은 아이들의 희생을 누구보다 슬퍼해 분향소를 찾았으며 가난했지만 성금까지 낸 착하디착한 사람 아닌가. 이렇게 착하고 바른 사람들이 많은데 왜 우리는 평화에 목말라하는 것일까? -
아직 세상물정에 어두운 대학 1년생의 이글을 그 국회의원은 혹 읽어 보았을까?...필경 외면했을 것이다. 왜? 그녀는 자기주장만 옳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서 그렇다.
“오만한 자는 반드시 망하게 되어있다”란 링컨의 명언이 새삼 우리의 가슴을 때리고 있다.
<작가, 본지 자문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