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아는 임산부 신체 일부 VS 업무상 재해는 근로자 본인에게 적용
국내에서 선례가 없었던 ‘여성근로자 자녀의 산재 문제’를 두고 법정에서 치열한 공방이 벌어졌다. 높은 업무강도에 시달리며 유해한 약품을 취급하다 선천성 심장질환 자녀를 출산한 허모(32·여)씨 등 제주의료원 전·현직 간호사 4명이 ‘업무상 재해를 인정해 달라’며 근로복지공단을 상대로 낸 소송의 3차 변론이 지난 7일 서울행정법원 행정7단독(이상덕 판사)에서 열린 것이다. ‘열린법정’ 형식으로 진행된 이번 재판에선 산업재해보상보험법의 적용범위, 인과관계 등을 두고 원고와 피고 간 치열한 논쟁이 벌어졌다. 이 사건 재판의 주요 쟁점은 당사자가 근로자임을 전제로 하는 산재보험법을 근로자가 아닌 태아에도 적용할 수 있는가다. 원고 간호사들은 제주의료원 근무 과정에서 유해성 약물 흡입 등으로 인해 심장질환을 앓는 자녀를 출산했다며 산재로 인정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원고 측 변호인은 “우리 민법은 태아를 권리능력이 없는 모체의 일부로 해석하고 있다”며 “민법상 규정을 산재법에도 적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어서는 “임산부 신체의 일부였을 때 태아에게 질병이 발병했다면 태아가 출생해 임산부와 별개의 인격이 된다고 해도 산재보험법의 적용을 받아야 한다”고 변론했다.
즉 임신 중 태아는 법상 임산부 신체의 일부로 다뤄지는 만큼 태아가 장해를 입었다면 근로자인 임산부의 신체 일부에 대한 장해로 보고 산재법을 적용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현행 산재보험법은 태아에 대한 재해를 근로자의 재해로 볼 수 있는지 명시적으로 규정하지 않고 있다.
반면 공단 측은 유사 사건의 형법 판례를 들어 태아에 대한 재해를 산재로 볼 수 없다고 반박했다. 공단 측 변호인은 “우리 형법은 태아를 사망에 이르게 하는 행위를 임산부의 신체에 대한 훼손 등 상해로 보고 있지 않다”며 “같은 맥락에서 업무상 재해는 본인에게 적용하는 것으로 태아의 질병을 여성 근로자의 업무상 질병으로 바로 볼 수는 없다”고 반박했다.
아울러 “독일의 경우 1977년 연방헌법재판소의 결정을 통해 산재보험 청구권은 출산 후 자녀가 별도로 유효하게 행사할 수 있다고 봤다”며 임산부들에게 산재청구권이 없다고 주장했다. 1시간여 동안 이어진 이날 공방 이후 재판부는 방청인들과 의견을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방청인들은 대부분 이 사건을 산재로 봐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날 방청객으로 공판을 지켜본 간호조무사 김명숙(43·여)씨는 “일반 사업장에서는 임산부들이 건강한 아이를 출산할 수 있도록 유해작업이나 유해물질에 노출되지 않도록 하고 있다”며 “임산부와 태아 간 인과관계가 없다면 대부분의 사업장에서 왜 이런 조치를 취하는 것인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허씨 등 이 사건 원고 4명은 모두 제주의료원에 근무하던 간호사들로, 2009년 임신해 유산 증후를 겪다가 모두 선천성 심장질환을 앓는 자녀들을 출산했다. 이들 외에도 같은 기간에 임신한 제주의료원 간호사들 중 5명이 유산을 했다.
허씨 등은 제주의료원 근무 과정에서 겪은 업무상 과로와 스트레스, 유해약물 노출 등으로 태아의 심장 형성 과정에 장애가 생겼다며 공단에 2차례에 걸쳐 산재를 신청했지만 모두 거부되자 이 사건 소송을 냈다.
저작권자 © 안전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