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끄러움과 미움의 문화가 갖는 힘
부끄러움과 미움의 문화가 갖는 힘
  • 정태영 기자
  • 승인 2015.03.25
  • 호수 2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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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준 문학평론가 포스텍 인문사회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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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모두 학생이자 선생이다. 세상에 태어나 자라고 늙어가는 과정에서, 이런저런 것들을 배울 때 우리 모두는 학생이다. 자신이 익힌 것을 남에게 알려 줄 때는 물론이고 알게 모르게 누군가에게 역할 모델로 비칠 때 우리는 선생의 자리에 서게 된다.

우리의 삶이란 것이 끊임없이 배우고 가르치는 과정의 연속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사회 일선에서 은퇴하여 자신의 인생을 갈무리하는 시점에서도, 인생의 의미를 스스로 배우는 학생이자 주변 사람들의 시선에 자신의 생이 포착되는 선생이라고 할 수 있다. 사회생활을 시작하는 사회 초년생이 학생인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지만 이들 또한 자기 후배에게는 일종의 역할 모델로 설정되어 선생의 자리에 서게 된다고 할 수 있다.

우리가 학생이자 선생이라는 점이 가장 잘 확인되는 것은 가정에서다. 자녀로서 우리는 학생이며 부모로서 우리는 선생이다. 친족 관계나 생활 공동체로 넘어가면 우리의 학생, 선생 관계는 훨씬 두터워진다.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우리는 부단히 배우고 가르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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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생(後生)이 가외(可畏)라는 말이 있다. 젊은 후학들이 공부하기에 따라 큰 인물이 될 수 있어 가히 두렵다는 뜻으로 ‘논어’에 쓰인 말이지만, 젊은이의 가능성을 고려해서 소중히 다뤄야 한다는 뜻으로 풀어도 좋겠다. 미래가 어떨지 모르니 현재에 막 다루지 말라는 의미로도 읽을 수 있는데, 그렇게 보자면 사실 좀 야박하다. 이보다는, 후생에게 대하여 우리가 선생의 자리에 서게 되니 자신의 언행에 주의해야 한다는 의미로 읽는 것이 좋지 않나 싶다. 괜찮은 선생이 되기 위하여 자신을 추슬러야 한다는 뜻으로 말이다.

우리가 원하든 원치 않든 간에 우리는 항상 우리보다 젊은 사람들[후생(後生)]에게 본이 된다. 모범적인 인물이 될 수도 있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본받지 말아야 할 인물로 규정될지도 모른다. 해서 두려운 것이다[가외(可畏)]. 두렵다고 했지만, 실상 이는, 나를 반면교사로 삼게 될 누군가의 시선을 의식하여 자신의 결함을 부끄러워하고 바로잡게 된다는 긍정적인 의미를 짙게 띠고 있다. 선생이면서 스스로 학생이 되는 상황의 가치가 여기서 발견된다.

‘후생 가외’가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는 곳이 바로 가정이요 직장이다. 부모에 대한 어린 자식의 맹목적인 추종이야말로 자녀를 학생으로 둔 ‘선생 부모’의 자리를 막중한 것으로 만들어 준다. 자식의 행실이 내 인격의 척도가 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다. 직장 생활에 있어서도 상사의 고과평가보다 후배들의 인금 매기기가 보다 의미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후배들의 협력을 끌어내는 리더십을 발휘하지 못하면서 성공하는 직장인이란 꿈도 꿀 수 없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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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의 자리에 서게 되어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알려 주게 될 때 우리가 가장 경계해야 할 점은 무엇인가. 얼핏 생각하면 역설 같겠지만 ‘가르치려 들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교육의 참뜻이 계몽에 있음을 고려하면 ‘선생의 교설적인 태도’가 모순이라는 점이 명확해진다. 칸트가 말했듯이 계몽이란 ‘사람들 저마다가 갖고 있는바 무언가를 배울 수 있는 능력’을 스스로 활용할 수 있도록 깨우쳐 주는 일이다. 이러한 계몽의 의미를 따라서, 결과로서의 지식을 주입시키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문제를 풀고 지식을 습득할 수 있도록 능력을 일깨워 주는 것이 참된 교육이라 할 때, 말로만 설명하는 교설적인 태도야말로 선생 역할을 저버리는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요즘은 그 말 자체도 잘 쓰지 않지만, ‘가정교육’에서도 동일한 원리가 작동한다. 선생의 역할을 하는 부모가 명심해야 할 첫째는 말로 가르치려고만 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아이들더러는 공부하라고 하면서 부모는 텔레비전만 볼 때 그 결과가 어떨지를 생각해 보면, 자신의 행동과는 다른 내용을 말로 강제하는 것만큼 실효 없는 교설도 없다는 사실이 자명해진다. 직장에서라고 사정이 다르지 않음은 물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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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살이가 갈수록 힘들어지는 상황을 더욱 어렵게 만드는 요인 하나는, 인간관계가 척박해지는 데서 찾을 수 있다. 사회적 조건이나 정치경제적 상황 등이 근원적인 원인이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해서, 인간관계의 문제를 경시할 수는 없다. 사회적인 문제에 당당히 맞서 보다 나은 환경을 만들기 위해서도 인간관계 같은 일견 소소한(!) 측면에서의 삶의 질을 높여 우리의 기운을 북돋는 일이 필요하다.

따라서, 보다 인간적인 관계를 만드는 데 있어 긴요한 방안 하나가 우리 모두가 선생이자 동시에 학생이라는 사실을 명심하는 것이라는 주장이 안이한 것일 수는 없다. 인간관계는 물론이요 사회의 여러 문제들이 옳지 못함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착하지 못함을 미워하지 못하는 데서 한층 힘들어지고 심해진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더욱 그러하다.

가정에서든 직장에서든 우리 모두가 선생이자 학생이라는 이중성을 자각하고 서로에게 환기시켜 줄 때, 정의와 공동선에 비추어 자신을 돌아보고 서로를 경계하는 일이 활성화될 것이다. 부끄러움과 미움이 올바로 제기되는 이러한 문화 풍토 속에서야, 세상살이의 어려움과 사회의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있어서 보다 근본적인 해결책에 눈을 돌릴 수 있게 되리라고 나는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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