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독의 시대’ 넘어서기
‘중독의 시대’ 넘어서기
  • 정태영 기자
  • 승인 2015.04.08
  • 호수 2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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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준 문학평론가 포스텍 인문사회학부 교수
마음을 채우는 인문학 샘터

우리는 ‘중독의 시대’를 살고 있다. 이 말은 두 가지 층위에서 의미를 갖는다. 다양한 중독 현상이 우리 사회에 만연되어 있다는 현실 진단의 맥락이 하나고, 그러한 진단을 낳을 만큼 중독에 대한 우려가 고조되어 있다는 의식 차원이 다른 하나다.

치료를 요하는 알코올 중독은 물론이요, 자신의 의지로 어쩌지 못하는 흡연이나 게임, 인터넷 서핑, 홈쇼핑 주문 등이 실제적인 중독으로서 중독의 시대라는 진단의 근거가 된다. 한편 중독 대상이 다양해지는 현상을 고려하면 중독 자체가 유일한 문제는 아니라는 사실에 생각이 미치게 된다. 카페인 중독이니 탄수화물 중독 등이 좋은 예가 되는데, 이런 경우는, 정말로 그것이 병적인 중독이어서라기보다는 건강에 대한 우려나 다이어트에 대한 관심 등이 강박 수준으로까지 고양되면서 커피나 빵을 끊어야 한다는 염려가 강화된 상태일 뿐이라 할 것이다.

이렇게 우리 사회는, 중독 대상도 많아지고 중독에 대한 염려도 고조되어 실제와 의식 양 면에서 공히 ‘중독의 시대’에 처해 있다 하겠다.

중독 자체에 대해 여기서 길게 논할 수는 없다. 의학적으로 볼 때 중독이란, 유해물질에 의한 신체 증상으로서의 ‘약물 중독(intoxication)’과 약물 남용에 의한 정신적인 중독인 ‘의존증(addiction)’으로 나뉜다고 하는데, 이를 자세히 살피는 일은 우리의 관심사가 아니다. 중독에는 ‘화학 물질 중독’과 ‘행위 중독’이 있으며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는 대부분의 중독은 행위 중독에 해당된다는 점만 공유하면 충분하다. 행위 중독의 경우도 증상이 심한 환자의 경우는 치료를 받으면 될 것이므로, 그 원인으로 거론되는 ‘보상 결핍’이나 ‘현실에서의 자존감 저하’ 등을 깊이 따져보는 일 또한 이 자리의 몫은 아니다.

인문학의 견지에서 보다 주의를 끄는 것은, 중독에 대한 우려와 그러한 우려를 근거로 제기되는 각종 처방이 야기하기도 하는 문제이다. 여기서 문제적인 것은 ‘지나친’ 처방이고 그것을 가능케 하는 ‘지나친’ 우려 담론이다.

예를 들어 생각해 보자. 알코올 중독에 대해 우려하는 것 자체는 문제될 일이 없지만, 그 우려가 지나쳐서 사회의 모든 술을 없애는 금주령을 시행하자고 하면 문제가 심각해진다. 소수의 알코올 중독자를 치료하고 중독을 예방하는 각종 조치를 시행하면 될 일을 사회적으로나 문화적으로 긍정적인 기능이 적지 않은 술 자체를 없애는 식으로 해결(?)하려는 것은, 음주의 양과 빈도 및 의존성의 문제를 술의 존폐 문제로 바꾸어 대처하는 범주 착오의 오류에 해당된다. 물론 무언가 논리적인 착오를 범했다는 것이 중요한 문제는 아니다. 이러한 엉뚱한 조처가 행해진다면 그것은 문제의 해결이 아니라 사회 구성원 일반에 대한 통제이자 폭력에 불과하다는 점이 정작 심각한 문제이다. 이렇게, 알코올 중독에 대한 순수하고도 열의에 찬 우려가 다른 아무 것도 돌보지 않은 탓에 그러한 폭력을 행사하게 되는 경우, 중독에 대한 우려가 중독 자체보다 더 큰 문제를 일으킨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상은 가상의 사태를 생각해 본 것이지만, 유감스럽게도 이러한 생각은 지나친 것도 쓸데없는 것도 아니다. 16세 미만 청소년들의 인터넷 게임 과몰입 문제를 해결한다고 정부가 (스마트폰의 확산으로 사실상 유명무실해진) 셧다운제를 시행하기도 하고, 국내 굴지의 대기업이 흡연이 건강에 나쁘다는 이유로 모든 계열사 직원들에게 금연을 강요하며 소변검사까지 시행했던 사례 등을 생각하면, 금주령을 내렸던 1920년대의 미국과 21세기의 우리나라가 별 차이가 없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도리가 없게 된다.

이러한 조치들은, 중독 대상이 아니라 소수의 이용자가 문제이며 좀 더 확대한다 해도 관련 문화의 일단이 문제라는 사실을 무시한 채, 사회 구성원들을 획일적으로 통제하려고 한다는 점에서 비민주적이고도 폭력적이다. 또한, 사람들의 본성과 행태를 폭넓게 인정하지 않고 자신의 주관을 앞세워 옳고 그른 것을 가른 뒤 일도양단하듯 타인들의 삶을 부정한다는 점에서 반문화적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객관적인 사실 판단이 내려지기도 전에 일부 주장을 근거로 실제 조치를 취한다는 점에서 이데올로기적이기도 하다.

따라서 필요한 일은 중독에 대한 지나친 우려를 지움과 동시에 중독 현상을 예방할 수 있는 좀 더 인간적이고 문화적인 방안을 모색하는 것이다. 여기서 ‘동시에’라고 말한 것은 실로 이 두 가지가 함께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폭력적인 반중독 조치들은 중독 강박이라 이름 지어도 좋을 만큼 병적 현상인 ‘중독에 대한 과도한 우려’에서 나온다고 할 수 있다. 이런 태도의 바탕에는 자신들의 삶의 태도만이 올바르다는 과대망상적인 자부심과 다른 사람들과의 차이를 용납하지 못하는 독단적인 편협함이 깔려 있다고 할 만하다. 그러한 태도에서 만들어진 부당한 규율들이 인간의 자유와 주체성을 훼손하고 그만큼 문화를 위축시켜 왔음은, 미셸 푸코의 역작 「감시와 처벌」이나 「성의 역사」를 통해서도 세세하게 밝혀진 바 있다.

오해를 막기 위해 중언하자면 의학적인 처치를 요하는 중독증 환자의 경우야 당연히 치료를 해야 하지만, 그들 몇몇을 근거로 중독 재료 자체를 금하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정민 선생의 「미쳐야 미친다」가 보여 주듯 역사에 남는 의미 있는 문화적 성과들 또한 중독만큼 과한 몰입의 산물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요즘 회자되는 ‘창조’를 위해서도 중독적인 태도 자체를 사갈시해서는 안 될 것이다. 무언가를 금지하려 하는 대신에, 좋은 결과를 낳을 ‘미칠 만한 대상’을 많이 만들고자 노력하는 것이 훨씬 더 문화적이고 동시에 생산적인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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