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준 문학평론가 포스텍 인문사회학부 교수
마음을 채우는 인문학 샘터내가 근무하는 대학은 교내에 숙소가 있어서 현관문을 나서 연구실에 들어오는 데까지 걸어서 15분밖에 걸리지 않는다. 이렇다 보니 연구실이 집 안의 서재 방인 양, 출장이 없을 때면 언제든지 나는 연구실에서 시간을 보낸다. 가끔은 아이도 함께 데리고 와서, 저는 공부를 하게 하고 나는 내 일을 한다. 딸애와 함께 연구실로 나올 때는 절차(?)와 의전(!)이 다소 복잡하다. 딸 바보답게 무거운 가방을 매는 것은 물론이요, 중간에 마트에 들러서 음료수와 과자 등속을 사 준다. 가끔 들르는 터라 이제는 우리 부녀를 알아보시는 마트의 직원 분들과 한두 마디 인사를 건네는 것도 일정에 포함된다.
간혹은 곧장 연구실로 오게도 되는데, 이럴 때 절차가 좀 더 복잡해진다. 아래층에 있는 자동판매기에서 음료를 구하는데, 연구실에 들러 동전을 챙긴 뒤 함께 내려가 딸애의 음료수를 뽑아 돌아온 후, 나는 다시 컵을 챙겨 사무실에 가서 커피를 담아 오는 것이다. 전혀 효율적이지 못하게 두 번 걸음을 하는 것인데, 이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소소하게는, 딸애와 함께 자동판매기를 찾아가서 딸애가 음료를 고르는 것을 봐 주고 하는 그 짧은 시간을 이용해 이야기를 나누는 즐거움이 크기 때문이다. 보다 근본적으로는 자동판매기 시스템이 갖는 비인간성에 매몰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자동판매기는 비인간적이다. 우리의 선택을 기다리는 물품들이 보기 좋게 진열되어 있고 돈을 넣고 단추를 누르면 그것이 툭 하고 우리 앞에 주어지는 편리함이 매우 크며, 대부분의 경우 시간을 많이 절약할 수 있는 이점 또한 대단해서 별다른 생각을 하기 어렵지만, 자동판매기의 이런 멋진 기능이 가리고 있는 것에 주의를 돌리면 사정이 뚜렷해진다.
자동판매기가 가리는 것은 무엇인가. 바로 판매·구매 행위의 인간관계이다. 어디서든 흔히 볼 수 있는 커피나 음료수 자동판매기든, 화장실 같은 곳의 휴지 자동판매기든, 지하철역의 승차권 자동판매기든 간에, 자동판매기로 무언가를 구입할 때 우리는 혼자다. 네모진 기계 앞에 혼자 서서 돈을 넣고 단추를 누르는 단순한 행위만으로 원하는 물품을 얻고 혼자 돌아설 뿐이다. 말 한마디 건넬 필요가 없다. 이렇게 나와 기계 사이의 단순한 관계로 물품을 구입하게 되면서, 그 물품을 생산한 사람들은 물론이요, 거기에 물품을 쟁여 넣은 사람의 존재가 잊힌다. 기계로 대체된 판매원은 존재 자체가 애초부터 지워져 있다.
이렇게 사람들이 가려지면서, 자동판매기를 사용할 때 우리는, 한 잔의 커피든 휴지 한 팩이든 그 모든 것을 쉽게 구할 수 있게 해 주는 것이 사람들의 노동이며 사람들 사이의 관계라는 사실을 의식하지 않게 된다. 눈앞에 사람이 없는 상태로 무언가를 구하게 되면서, 기계 시스템에 의해 가려진 것을 보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모든 판매기(vending machine)들을 포함하여 자동화된 기계 시스템 일체가, 우리가 무언가를 구하고 누리는 사회생활이 사람들 사이의 일이라는 사실을 잊게 만든다. 사람들 사이의 일을 사물들 사이의 일로 착각하게 함으로써 우리 또한 사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마르크스, 「경제학-철학 수고」).
사물화(reification)라 부르는 이러한 과정은 우리 시대에 한층 널리 퍼졌다. 작게는 각종 자동판매기들이 그러하고, 크게는 포드시스템 이래 발전을 거듭해 온 자동화 공정이 갖춰진 분업적인 생산 시스템이 그러하며, 사회 전반적으로 보자면 사용자 인터페이스가 개인 단위로 되어 있는 인터넷이나 사회관계망 서비스(SNS) 또한 그러하다.
찰리 채플린의 명화 <모던 타임즈>가 보여 주었듯 분업화된 자동화 생산 공정이 인간의 노동을 소외시키고 노동자를 사물처럼 다루는 것은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런데 사태는 이에 그치지 않는다. 사물화 과정에서 소외되는 것이 생산자만은 아니라는 데서 문제는 보다 심각하고 현재적이다. 각종 판매 기계로 물품을 구입할 때 소비자인 우리 또한 판매·구매의 인간관계를 망각함으로써 스스로 소외된다(짐멜, 「돈의 철학」). 컴퓨터 모니터나 스마트폰의 화면이라는 기계 장치의 일부만을 직접 대하면서, 바로 앞에 대화의 상대방이 있을 경우라면 할 수 없고 하지 않을 말도 거리낌 없이 해댈 때, 우리는 인터넷에 의해서도 소외되며 스스로 인격을 잃는다. 사물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소외 양상, 사물화 현상이 깊어지면, 실제로 사람을 대할 때에도 그 사람을 사람으로 대하지 않는 지경에 이르게까지 된다. 직장 내에서 수직적 업무 관계에 놓인 부하(!) 직원을 대할 때 인격을 무시하는 것이나, 각종 물건이나 서비스를 구입하면서 판매원을 인격적으로 대하지 않고 상품 매매 관계의 수행자(agent)로만 여겨 함부로 대하는 것, 이른바 ‘갑질’이 대표적인 예다. 우리 사회에 만연한 ‘갑질’이란, 자신이 행하는 활동이 상호주체적인 사람들 사이의 인간관계라는 점을 잊어버리고 행동함으로써, 상대의 인격은 물론이요 자신의 인간성까지 훼손하는 사물화된 의식의 산물이다.
사정이 이러해서 나는, 사춘기를 지내며 세상을 알아가는 내 딸애가 사물화된 의식에 가능한 한 빠지지 않게 하려는 마음에서, 음료수 자동판매기를 사용할 때 그 옆을 지켜 준다. 자동판매기가 제 기능을 하는 데 수고를 아끼지 않은 분들의 존재를 잔소리 비슷하게 일깨워 주면서 말이다. 마트에서 함께 물건을 살 때 판매원 분들과 계산 관계와는 무관한 인사말을 나누는 것이나, 식당에서 음식을 먹을 때 직원이나 주인에게 감사의 말을 전하는 것도 모두 이러한 교육적 목적을 염두에 둔 것이다. 이렇게 딸애 앞에서 사물화를 끊임없이 경계하는 나는, 딸 바보가 아니라, 우리 시대에 절실히 필요한 가정교육을 수행하는 아비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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