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준 문학평론가 포스텍 인문사회학부 교수
대중들에게 널리 사랑 받는 작가 김탁환이 최근의 한 강연에서 소설가란 헬리 혜성과도 같다고 했다. 이 구절만 보면 ‘혜성처럼 빛난다’는 말을 떠올리고 소설가란 반짝이는 존재라는 뜻으로 말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사정은 그렇지 않다. 헬리 혜성을 끌어오면서 그가 주목한 것은, 지구의 밤하늘을 밝히는 그 찬란한 빛이 아니라 그러기 위해서는 75년이나 되는 긴 시간 동안 캄캄한 우주를 홀로 공전해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소설가 또한 그렇게, 원고지나 컴퓨터 파일을 채워 나가면서 혼자서 오랜 시간을 보낸 뒤에야 완성된 작품을 들고 대중 앞에 서게 되는 존재라는 것, 외로운 작업을 오래 오래 한 뒤에야 잠시 반짝이는 존재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세상에는 그러한 사례들이 적지 않다. 괴테의 「파우스트」는 구상에서 완성까지 60년 가까운 시간이 들었고, 홍명희의 「임꺽정」 또한 10여 년간의 연재를 통해 일단락되었으며, 박경리의 「토지」는 25년 세월에 걸쳐 완성되었다. 한 개인에 의해 창조되는 문학작품만 그러한 것은 아니다. 세계적인 건축가 안토니오 가우디가 1883년 건축 감독을 맡은 스페인의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은 그의 사후 100주년이 되는 2026년 완공을 목표로 아직까지도 공사 중이다.
예술작품만 그러한 것도 아니다. 영화 <콘택트>를 통해 널리 알려진 ‘외계 지적생명체 탐사(SETI)’ 프로젝트도 1960년 이래 지속되고 있다. 블랙홀이 생겨 위험한 것은 아닌가 하는 논란으로 전 세계 인구에 회자되었던 유럽입자물리학연구소(CERN)의 강입자충돌기(LHC)는 건설 과정만 14년이 걸렸다. 인문학자의 연구도 비슷하여, 최근에 출간한 연구서 한 권을 쓰는 데 나는 만 8년의 시간을 투자했다.
세상의 일 대부분이 비슷하다. 구상이나 기획에서 시작하여 구체적인 실행의 시간이 길게 지속된 뒤에야 그 성과를 볼 수 있게 마련이다. 실행 과정에서 수많은 시행착오가 있는 것은 다반사며 그런 만큼 추가적인 시간이 소요되게 된다. 이렇게 인류 문화의 증진에 기여해 온 많은 성과들이 오랜 시간을 요하는 법인데, 유감스럽게도, 이 자명한 사실이 쉽게 그리고 널리 무시되는 사회에 우리가 살고 있다.
어떠한 일에든 그에 소요되는 만큼의 시간을 투자해야 한다. 원래 의도했던 바를 얻어내는 것이 목적인 이상 그에 소요되는 시간을 아끼려 해서는 안 된다. 시간을 아껴서 원래 의도했던 바에는 미치지 못하는 것을 얻고서도 만족하기로 생각한다면, 이는 자신이 원하던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그새 잊어버린 바보에 다름 아니라 할 것이다.
시간 아끼는 것을 능사로 삼는 이러한 바보가 여전히 우리 사회에서 위세를 떨치는 것 같아 유감이다. 시끄러운 정치 사건들에 의해 묻히다시피 한 최근의 뉴스 하나가 이러한 생각을 갖게 했다. 수서발 고속철도 공사가 진행되고 있는데, 현장에서 안전을 위한 지반 보강 공사를 이유로 개통 일자를 연기해 달라고 요청한 데 대해 국토교통부가 반대했다고 한다. 두 차례의 요청 모두 국토교통부에 의해 반려되었다 하는데, 반려의 이유란 것이 ‘국민과의 약속’과 관련 회사의 ‘적자’라 한다(경향신문, 2015.4.21).
이 사건은 국토교통부야말로 시간을 맞춘다는 미명 아래 원래의 목적을 어기는 전형적인 바보라는 사실을 알려 준다. 국민이 원하는 것은 고속철도다운 고속철도를 만드는 것, 안전 문제가 없는 제대로 된 고속철도를 개통하는 것이지 애초에 발표한 개통일자를 맞추는 일일 수 없다. 이렇게 원래의 목적을 잊은 것에 더하여, 안전불감증이 세월호 침몰의 주요 원인이라는 사실조차 떠올리지 않은 것이니, 현장의 요청을 거부한 국토교통부의 결정에 정치적인 의도가 있다고 기자가 의심하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라 하겠다.
국토교통부의 이번 처사는 우리 한국 사회의 부끄러운 실상을 두루 확인시켜 준다. 한국 사회의 병폐로 ‘빨리빨리 현상’을 드는 것이 지나간 세월의 일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한 외에, 국민의 안전과 생명보다 기업의 경제적인 이익을 앞세우는 ‘천박한 황금만능주의’가 행정 관료와 정치인들의 뼛속 깊이 스며 있다는 사실을 환기시켜 주었다. 있을 수 있는 정치적 의도의 주체가 할 법한 말을 국토교통부가 대변했다는 점에서는 이른바 ‘유체이탈화법’이 얼마나 만연하게 되었는지를 보여주기도 하였다.
정부의 특정 부처를 비판하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은 아니다. 기다림이 필요한 일을 재촉하기만 해서는 안 된다는 자명한 사실, 어떤 일이든 빠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잘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기본적인 사실, 무릇 어떠한 일의 완성이란 원래의 의도가 오롯이 실현되었을 때 이루어지는 법이라는 원리를 잊지 말자는 것이다. 시간의 문제로 다시 말하자면, 밥을 지으려면 뜸 들이는 시간을 아낄 수 없고 우물에서는 숭늉을 찾지 말아야 하듯, 무슨 일이든 제대로 하려면 그에 걸맞은 시간을 투자해야 한다는 것이다.
기다려야 할 일을 기다리지 않는 풍토에는 여러 원인이 있을 것이다. 시간이 됐든 돈이 됐든 투입량을 줄여 효율성을 높이려는 경제적인 사고방식이 실제적인 요인이라 할 수 있다. 여기에 더하여, 결과로서의 성과만을 중시하는 ‘성과사회’적인 특징(한병철, 「피로사회」)을 빼놓을 수 없고, 탐내는 바를 즉시 가질 수 있게 함으로써 우리들의 삶에서 기다림을 전제하는 모든 것을 제거해 버린 신용 거래의 일반화(파스칼 브뤼크네르, 「순진함의 유혹」) 현상도 추가할 수 있겠다.
보다 궁극적으로는, 바로 이러한 인문사회과학적 진단들에 대한 우리의 무지와 이 글 앞부분에서 밝힌 사례들에 대한 우리의 망각이야말로, 시간 투자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경시하는 현상, 기다림이 없는 세상을 지속시키는 근본 원인이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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