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준 문학평론가 포스텍 인문사회학부 교수
2015년 올해의 이상문학상을 수상한 소설가 김숨의 작품 중에 「법 앞에서」라는 것이 있다. 학교폭력의 가해자인 아이를 둔 아버지가 피고석에 서게 될 아들을 보러 법정을 찾아가면서, 가난하고 무지했던 자신의 부친과도 달리 스스로는 자식에게 선악을 가르치지 못했음을 반성하는 내용이다. 다섯 명의 아이들이 한 아이를 못살게 군 사건의 다섯 번째 가해자를 아이로 둔 소설 속의 아버지와, 우리들 각자는 과연 얼마만 한 거리를 두고 있을까. 왕따라 불리는 집단 따돌림이나 학교폭력의 문제를 우리와는 관계없는 ‘소설 같은’ 이야기라고 던져두어도 좋을까. 그럴 수 없다는 생각에서 이 글이 시작된다. 자식 키우는 일이 녹록치 않은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유아원, 유치원 무렵부터 국어를 떼게 하는 것은 물론이요 영어와 수학 등속까지 공부시켜야 한다. 초등학교 이후로는 교과공부를 위해 학원에 보내는 것 외에, 각종 예체능 실기 교육을 시키고, 이런저런 캠프 등에도 보내 주어야 한다. 이 모두에 적지 않은 돈이 들어, 2014년 기준 가구당 사교육비 지출 금액이 월 평균 53만여 원에 이르러 70~80%의 부모가 사교육비 지출을 부담스러워하고 있다.
자식 키우는 일이 정말 쉽지 않다는 것은, 허리띠를 졸라 매며 사교육비를 지출하는 것만으로 부모의 책임을 다했다고는 절대 말할 수 없다는 상황에 있다. 유치원이나 초등학교에 자녀를 처음 보내는 부모들이 가장 신경 쓰는 것은, 선생님이 괜찮은 분일지, 아이가 잘 적응할 수 있을지와 같은 비경제적인 문제들이다. 심심찮게 보도되는 교사들의 폭행이나, 학교에 만연된 왕따 현상이나 학교폭력 문제 등을 생각하면, 교육의 장이 교육의 장답지 못한 이러한 문제들이야말로 자식 키우는 일을 더 어렵게 하는 보다 근원적인 문제라 하겠다.
이러한 문제를 풀어 자식 키우는 일의 어려움을 줄이기 위해서는, 교육의 근본을 따져보는 일이 필요하다. 교육이란 무엇인가. 크게 두 가지 이야기를 해 볼 수 있다. 인간의 본성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일이라고 보는 생각이 하나요, 인간의 동물성을 순치하여 사회 공동체의 안녕에 기여하는 자율적인 구성원을 키우는 사업으로 간주하는 견해가 다른 하나다.
요즘은 들어보기도 어려운 ‘전인교육’이 좋은 예가 되는 첫째 견해는 루소에 의해 대표된다. 그에 따를 때 교육이란, 자연적으로 이루어지는 우리의 능력과 기관의 내적 성장[자연의 교육]에 맞추어, 그러한 능력과 기관의 이용법[인간의 교육] 및 경험에 따르는 사물의 이해[사물의 교육]를 통일시킴으로써 자연인을 만드는 일이다. 이렇게 교육될 때 인생의 좋은 일 나쁜 일에 잘 견딜 수 있는 인간이 된다고 하였다(루소, 「에밀」).
인간의 자연적 본성에 대한 루소의 낙관적인 신뢰와 거리를 두고 사회를 고려하면서 교육을 정의한 경우가 칸트이다. 그는 훈육을 통해서 동물성을 인간성으로 변화시켜 난폭함을 없애는 것을 교육의 시작으로 꼽는다. 이 위에서 양육과 육성을 통해 조야함을 벗어나게 하면서, 이념을 가르침으로써 사회적 인간 즉 시민으로 만드는 것이 올바른 교육이라는 것이다(칸트, 「교육학 강의」).
서로 대립적인 두 사람의 견해에서 지금의 우리가 절실하게 주목해야 하는 것은 공통점이다. 교육이란 ‘인간’이나 ‘시민’을 키우는 거대한 사업이지, 수학이나 영어 같은 학과의 점수를 높이거나 기업이 요구하는 직무능력을 배양하는 하찮은 것이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그것이다. 전자는 학원에서도 가르칠 수 있고 후자는 기업들이 필요에 따라 그리고 상황의 변화에 맞추어 스스로 행하는 것이므로, 그것만이 학교교육의 전부가 되었을 때는, 하나의 사회, 한 국가의 교육으로서는 하찮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교육이란 무엇인가. 바람직한 공동체적 인간을 길러내는 국가 사회의 일이요 국가 사회의 의무이다. 따라서 공교육이 함양하는 것이 기업에서 요구하는 자질들에 국한된다면, 이는 국가 사회가 기업의 시녀 역할을 하는 것에 다름 아니라 할 것인데, 매우 불행하게도, 우리나라 교육의 실정이 이러한 상태에 빠져 있다. 이러한 상황의 근본적인 원인은 국가 사회 차원의 ‘교육 철학’이 부재하다는 사실이다. 보다 직접적인 원인을 찾자면, 최고 교육기관인 대학들이 기업의 눈치만 보면서 참된 교육을 방기하고 그러한 대학이 요구하는 문제풀이 능력을 높이는 것이 목적인 듯이 중등교육의 기능이 축소, 변질된 것을 들지 않을 수 없다.
인간도 시민도 길러내지 않는 교육, 공동체적 인간의 육성을 외면하는 교육 아닌 교육이야말로, 훈육되어야 할 우리 안의 야만이 그대로 발현되는 왕따 현상이나 학교폭력을 조장하는 온상이다. 우리의 아이들이 바로 학교라는 곳에서 인간에 대한 폭력을 배운다는 사실을 외면하지 않는다면, 자식 키우는 일을 어렵게 만드는 주범이 교육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사태는 매우 심각하지만, 위의 진단 속에 개선의 방향이 주어져 있다는 데 위안을 가져 본다. 공동체 구성원의 하나로 자신을 자각하고, 공동체의 안녕을 위해 모두에게 요청되는바 공동체에 대한 봉사와 동료들에 대한 돌봄과 배려의 정신 및 태도를 기를 수 있게 하는 교육 철학이 구현되어야 한다.
보다 직접적으로는, 어떤 측면에서 능력이 처지는 친구가 있을 때, 그를 왕따시키는 것이 아니라 편 가르기의 예외로 인정하여 놀이에 ‘깍두기’로 끼워 줄 수 있는 정신을 아이들이 갖추게 해야 한다. 특정 분야에서의 능력 부족자라 해도 더 넓은 의미의 공동체 차원에서는 동등한 구성원이라는 의식에서 발휘되는 그러한 ‘깍두기 문화’를 활성화해야 하는 것이다. ‘깍두기’가 ‘왕따’를 몰아낼 때, 바로 그때에만 우리 교육에 희망이 있고 우리 사회에 미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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