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거지 예찬
설거지 예찬
  • 정태영 기자
  • 승인 2015.05.20
  • 호수 2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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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준 포스텍 인문사회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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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리 잘하는 남자들 때문에 적지 않은 스트레스를 받게 된다.

일류 요리사 못지않게 멋진 요리를 만드는 남자들이 있는가 하면, 평범한 재료를 가지고 맛있는 음식을 뚝딱 만드는 남자들도 있고, 특이한 재료를 이용해서 건강에 좋은 요리를 만들어 내는 남자들도 있다. 취미로 요리를 하는 남자들도 적지 않은 모양이다.

요리하는 남자들 중에서 으뜸은 ‘가위남’이리라. ‘가족을 위해 요리하는 남자’가 ‘가위남’이란다. 남자들이 가족을 위해 하는 일이 요리 하나일 리 없음은 자명한데, ‘가요남’도 아니고 ‘가위남’으로 말을 줄이면서 가족을 위해 요리하는 남자를 지칭하는 것을 보면, 요리 실력이 남편이나 아버지가 반드시 갖춰야 할 요건 중의 하나로 여겨지는 것은 아닌가 싶기까지 하다.

할 줄 아는 것이 고기 굽기와 라면 끓이기밖에 없다시피 한 나(와 같은 사람들)로서는 스트레스를 받지 않기 어려운 상황이다. 일에 바빠 가족과 나누는 시간을 충분히 갖지 못한다는 자책을 늘상 갖고 있는 터에, 뭔가 능력이 부족한 가족 구성원으로 규정되기까지 하는 것은 아닌가 싶은 까닭이다.

이러한 심정을 해소하는 방편이자, 요리 못 하는 남자도 사랑받을 수 있는 방안을 공유하자는 뜻에서, 요리는 아니지만 요리와 결코 뗄 수 없는 다른 일을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설거지가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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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거지는, 가사노동 중에서 가장 상큼한 일이다.

걸쭉한 찌개 국물 자국이나 미끈거리는 음식 기름의 흔적, 눌어붙은 밥풀쪼가리나 잔에 묻은 커피 얼룩 등을 말끔히 없애서, 그릇의 살결을 매끈하게 드러내 주는 일이 설거지가 아닌가. 이렇게 보면, 비누 세수를 막 마친 어린애의 뽀얀 살결이 주는 상큼함을 항시 느끼게 해 주는 일이 바로 설거지라 할 수 있다.

설거지가 주는 정서적 선물은 대단히 크다. 각종 오점을 없애며 순연한 본바탕을 드러내 준다는 행위의 의미도 보람을 주지만, 설거지를 마친 뒤 가지런히 놓여 있는 깔끔한 그릇들의 풍경이 주는 신선함이야말로 말할 수 없는 상쾌함을 준다.

설거지의 과정도 크나큰 즐거움을 선사한다. 거품을 일으킨 수세미로 그릇들의 안팎을 닦아나가는 일, 때로는 쇠 수세미를 이용해서 힘껏 문지르기도 하고, 때로는 부드러운 수세미로 그릇의 결을 느끼며 부드럽게 닦아도 보는 일은, 아이를 목욕시키는 일처럼 뭔가 소중한 느낌까지 선사한다.

여기서 그치지도 않는다. 거품을 안은 채 차곡차곡 쌓인 그릇들을 흐르는 물 아래에서 깨끗하게 헹궈내는 일이야말로 설거지의 백미에 해당한다. 미끌미끌하거나 껄끄러웠던 것들이 씻겨나가면서 수돗물에 헤쳐지는 거품 너머로 그릇의 매끈한 자질이 드러나는 짧은 순간들은, 그릇 하나를 마쳤다는 성취감과 더불어 무언가 정화되는 과정이 주는 신선함도 제공한다.

신선함과 성취감이 반복되다 보면 설거지가 끝나게 마련이고, 깨끗하게 씻긴 그릇들이 잘 정돈된 채 물방울을 머금고 있는 장면은 상큼한 정물화를 마친 화가가 느낄 법한 기쁨을 선사한다. 마른행주를 쓰지 않는 나는, 자기 자리를 차지한 그릇들이 서서히 말라가는 과정을 상상하면서, 샤워 후의 개운함까지 느끼며 자리를 뜬다.

한 가지 덧붙일 수 있다. 자신을 위한 설거지가 아닐 경우에는, 가사노동을 분담하는 사람에게 나도 일을 했다는 것을 확연히 보여 주는 데 있어서 설거지 오른편에 나설 것은 없다는 사실이다. 한마디로, 설거지는, 정말 폼 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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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지고 보면 설거지는 참으로 대단한 일이기도 하다. 중간의 한 토막만 할 수는 없다는 점에서, 설거지는 어떤 의미에서도 소외되지 않은 노동이다. 또 한편으로 설거지는 먹는 일의 전 과정을 마무리하는 일이어서 요리를 포함하는 일련의 노동에 마침표를 찍는다는 성취감을 준다. 그러면서도, 성과가 나오자마자 없어지는 요리와 달리, 설거지의 결과는 우리가 보람을 느낄 만큼의 시간 동안 제 모습을 유지한다. 여기에 더하여 앞서 지적한 정서적 효과와 즐거움, 기쁨까지 생각하면, 어떤 노동이든 이만한 것이 없다 해도 그리 과장이 아니리라.

끝으로 꼭 부연해야 할 점은 설거지가 갖는 사후적인 성격이다. 설거지는, 지금 일의 마무리일 뿐 아니라, 다음번의 일을 대비하며 누군가를 배려하는 행위이다. 설거지를 하는 일은, 이런 점에서, 미래와 타인을 존중하는 자세를 일상적으로 갖춰나가는 과정이라고도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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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정이 이러하므로, 요리 잘하는 남자들만 추어올려서는 안 된다. 설거지가 없다면 요리 또한 있기 어렵다는 사실만 생각해도 그렇다. 요리와 설거지를 비교하자면 으레 요리가 앞에 나서고 설거지는 말 그대로 뒤처리 정도로 치부되기 십상이지만, 특히 가정에서는, 설거지 없는 요리는 사실 존재할 수 없다. 지금의 설거지가 다음의 요리를 가능케 해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설거지를 잘 하는 남자 또한 ‘가위남’이라 해야 마땅할 것이다. 설거지하기야말로 자신을 내세우지 않으면서 가족을 위해 궂은일을 하는 것이라는 실제적인 맥락에서도 그렇고, 앞서 지적한 대로 곰곰 생각해 보면 설거지가 즐거우면서도 의미 있는 일이라는 점에서도 그러하다. 무엇보다도, ‘가위남’을 요리 잘하는 남자로 한정하는 폭력이 부부 모두에게 주는 스트레스를 날리는 손쉬운 방법이라는 점에서, 설거지야말로 실로 가족 모두를 위한 일인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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