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도 돈도 아닌 실력의 세계
운도 돈도 아닌 실력의 세계
  • 정태영 기자
  • 승인 2015.05.27
  • 호수 2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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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준 포스텍 인문사회학부 교수
며칠 전, 매일 아침의 일과로 인터넷 뉴스들을 보다가 작은 감동을 느꼈다. 조훈현과 조치훈이 12년 만에 마주한다는 소식이었다. 무려 35년 전에 처음 맞서 조치훈이 2연승을 거둔 뒤, 그 뒤의 여덟 차례 만남을 조훈현이 내리 이기고, 끝으로 조치훈이 다시 한 판을 이겨, 통산 전적이 8:3이란다. 세상의 모든 것을 뚫는다는 창과 무엇이든 막을 수 있다는 방패를 함께 파는 상인의 경우에서 모순(矛盾)이라는 말이 유래되었거니와, 이 둘의 대결은 언제나 그러한 창과 방패처럼 결과를 점치기 어려운 경우다. 그러한 궁금증, 호랑이와 사자가 싸우면 누가 이길까 하던 어린 시절의 호기심 같은 것이 새삼스레 느껴져, 가슴이 설레었다.

물론 이러한 설렘과 궁금증이 감동을 준 것은 아니다. 조훈현이 62세요, 조치훈이 59세라니 예전 같으면 손주 머리나 쓰다듬을 나이임에도, 둘 모두 여전히 녹슬지 않은 실력을 뽐내고 있다는 사실이 내 가슴을 울려 주었다. 조훈현은 작년 11월 이후 시니어클래식에서 무려 18연승을 질주하고 있다 하며, 조치훈 또한 일본 최고 대회 중 하나에서 본선 멤버로 활약하고 있단다. ‘60 청춘’ 하는 말이 회자되기는 하지만, 이 두 조 씨야말로 그 산 증인처럼 활약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들의 전설적인 활동이 무려 몇 년인지를 따져 보면 울림이 한층 커진다. 조훈현이 프로 세계에 발을 들여놓은 것은 불과 9세로 세계 최연소 기록에 해당하며, 조치훈 또한 만 11세에 프로가 되어 일본 최연소 기록을 갖고 있지 않은가. 각각 무려 54년과 49년 동안 한 길을 걸어오며 한일 양국의 최고수로 노익장(?)을 과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이 맞서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면 감동이 더해진다. 예전에는 흔히 ‘신선놀음’이라 했고 근래 들어서는 ‘두뇌 스포츠’라 하는 것, 바로 바둑이다. 일찍이 조치훈이 ‘한 수 한 수 목숨을 걸고 둔다’ 했듯이, 바둑이란 반상을 마주하여 긴 시간 내내 피를 말리는 게임이다. 그러한 바둑의 길을 반백 년 외곬으로 나아오면서 한일 양국의 최고 정상의 자리를 지켜 왔으니, 60세를 전후한 그들의 인생, 현재에까지 강렬하게 이어지는 그 정념과 혼신의 노력에 어찌 감동 받지 않을 수 있을까.

말 그대로 ‘살아 있는 전설’이라 할 이들이 올해 7월에 12번째 대국을 벌인다니 바둑 팬들이 얼마나 열광할지가 눈에 선하다. 그렇지만 나는 그들의 대국을 볼 생각이 없다. 긴 시간 생중계로 볼 만한 여유가 없어서이기도 하지만, 대국 후라도 기보를 따라 돌을 놓아 보거나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저 기보 전체를 한 번 굽어보며(!) 음미해 볼 생각뿐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한 수 한 수 흑백의 돌을 짚어가며 두 조 씨가 벌이는 세기의 대국을 재구성해 본다 해도, 기껏해야 아마추어 4급 정도 되는 내 실력으로는 그들 행마의 깊은 의미를 전혀 알 수 없는 까닭이다…….

바로 이 사실, 취미로 바둑을 두기로는 별 어려움이 없는 나로서도 내 수준에서는 전혀 헤아릴 수 없는 고도의 수읽기가 펼쳐진다는 것을 알고 순순히(!) 인정한다는 이 사실, 이를 새삼 생각게 되었다는 점에서 이 뉴스를 접한 감동이 한층 강화되었다. 마땅히 있어야 할 위계는 찾아보기 어렵고 위세를 떨치는 위계란 것들은 정당성을 갖추지 못하여 많은 이들의 비판과 부정에 직면해 있게 마련인 우리의 사회 상황에 비추어 볼 때, 바둑 세계가 보여 주는 위계의 엄정성은 낯설게 느껴질 만큼 새삼스러운 감이 있다. 이 새삼스러움이 나의 감동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아는 대로 바둑에는 실력에 따른 등급이 있다. 프로기사들의 경우 1단에서 9단까지 아홉 계단이 있고, 아마추어들 사이에서는 항용 18급에서 1급까지 열여덟 단계가 있다고 이야기된다. 전체로 보자면 18급에서 9단에 이르기까지 모두 27개의 등급이 있어 바둑 세계의 위계를 이루는 셈이다.

가로세로 19개씩의 줄이 교차되어 생긴 361개의 점이 있는 조그만 판 위에 흑백의 돌을 하나씩 놓아 집의 칸 수를 많이 만드는 이 단순한 게임에 그렇게나 많은 등급이 있는 것도 놀라울 수 있지만, 실로 놀라운 점은 그러한 등급이 엄연한 실제여서 등급 사이의 위계가 확실하다는 사실이다. 흔히들 하는 말로 6급이 되어야 비로소 바둑판 전체를 볼 수 있게 되며, 집을 세면서 바둑을 둘 수 있어야 5급이고, 4급쯤 되면 전체적인 복기를 할 수 있다 하는데, 내 경험에 비춰볼 때 실로 맞는 말이다 싶다.

사정이 이러하니, 평범한 아마추어들이 두는 바둑과 프로기사들이 두는 그것이 바둑을 모르는 제3자가 볼 때는 비슷하게 보일지라도 그 사이에 얼마나 아득한 차이가 있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바둑을 어느 정도 두어 본 사람들은 이러한 사실을 잘 알고, 대개 다 이 엄연한 위계를 인정하면서 프로의 세계를 경외심을 갖고 대하게 마련이다. 위계에 대한 깔끔한 인정이 바둑인들 사이에 공유되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세계, 위계가 위계답게 엄연히 존재하고 그에 관련된 사람들 모두 그 차이를 십분 인정하고 존중하면서 스스로의 실력을 향상시키고자 노력하는 세계가 우리 주변에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두 조 씨의 대국 뉴스를 통해 새삼 느낀 것이 나의 감동을 자아냈다. 바둑의 세계가 우리 사회의 거울 역할을 한 것이다. 확실한 실력 차이에 의해 위계가 마련되고 사람들 또한 그것을 존중하는 바둑에 비춰 보면, 우리 주변에서 위세를 떨치는 위계들의 특성이 눈에 뚜렷이 들어온다. 이런 저런 위계들이 운이나 돈에 쉽게 좌우되어 사람들로부터 존중은 물론이요 동의조차 끌어내지 못하는 것이, 우리 시대 우리 사회의 자화상이라는 진단을 누가 쉽게 부정할 수 있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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