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이목을 끈 소설가 신경숙의 표절 사건과 관련해서 주목해 보고 싶은 대목이 하나 있다. 이러한 문제가 생기게 된 원인 혹은 배경 가운데 하나로, 노벨문학상을 받을 만한 대표 작가가 한 명 정도는 있어야 된다는 생각에서 문단이 그녀를 비호해 왔다는 지적이 제기되었던 사실이다. 요컨대 노벨문학상을 바라는 풍토가 이러한 문제의 한 가지 요인이 되었다는 것이다.
문단의 말석을 차지한 채 25년 정도 한국문학을 연구하고 가르쳐 온 입장에서 볼 때, ‘문단 권력’이나 ‘상업주의’ 등보다 이 말이 훨씬 충격적이었다. 내가 놀란 것은 그러한 지적이 허황된 것은 아니리라는 판단에서이다.
앞의 진단을 일반화해 보자면 다음과 같다.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를 배출하기 위해서는 가능성이 보이는 작가를 문학계가 띄워 주어야 하며, 그의 명성에 흠이 갈 만한 사항이라면 그것이 불거지지 않게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말이 되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전체적으로 보아 말이 되지 않는다는 것은 누구라도 알 수 있으니, 이에 대해서는 아까운 지면을 쓰지 않는다. 여기에서는 앞의 판단 곧 ‘노벨문학상 수상을 위해 문학계가 가능성이 보이는 작가를 키워야 한다’는 생각에 대해서만 이야기해 본다.
이러한 발상은 세 가지 점에서 문제적이다.
첫째로 지적할 것은 노벨문학상에 대한 태도상의 문제이다. 노벨문학상이 있을 때도 되었다는 생각, 한국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탈 때가 되었다는 바람, 일본은 두 번이나 탔고 중국도 노벨문학상 수장 작가를 배출했으니 우리나라도 노벨문학상을 꼭 가져야 한다는 강박 등이 모두 문제적이다. 어떠한 논리를 갖다 붙이더라도 이는 ‘상을 타기 위해 문학을 한다’는 말이 아니기 어려운데, 이러한 말이야말로 상품과 자본의 논리, 시장의 질서를 반성해 온 문학 정신과는 어울릴 수 없는 까닭이다.
노벨문학상이 꼭 있어야 하는가? 그렇지 않다. 노벨문학상 수여 현황이 보여주는 문학 외적인 요인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1901년 처음 시행된 이후의 수상자 국적을 보면 서구가 아닌 나라의 문인이 상을 받은 경우는 불과 10여 차례밖에 되지 않는다. 이렇게 114년 동안 112명을 배출하면서 서구인들이 100회 가까이를 독식한 상이라면, 수상 작가 선정 기준을 의심하는 일을 먼저해야 마땅한 일이다. 적어도 노벨문학상 수상에 연연할 일은 전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우리나라에서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가 나온다면 좋은 일이라는 점이야 부정할 것이 아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그 방법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둘째 문제로 꼽을 만하다. 노벨문학상은 문학계의 사람들이 특정 작가를 띄워 주는 방식으로 기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려고 준비하듯 경쟁을 통해 누구를 발굴하고 그를 키워 주고 해서 될 일은 전혀 아니라는 말이다. 문학예술작품의 빼어남과 가치는 운동선수의 역량처럼 비교를 통해 측정될 수 있는 것도 혹은 경매의 낙찰가로 매겨질 수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문학전문가들이 ‘비문학적인 발상’을 했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
노벨문학상은 따라오는 것이어야 한다. 훌륭한 우리 문인의 작품이 국제적으로 널리 알려져 진가를 인정받게 되면 자연스럽게 수상자가 나올 것이다. 따라서 한국 문단 차원에서 문인들이 할 일은, 한편에서는 좋은 작품을 열심히 쓰고, 다른 한편에서는 다양한 작품들의 특징과 경향을 엄정하게 논하는 것뿐이다. 여력이 있다면 외국 문인들과의 교류를 마다할 이유가 없지만, 그것이 앞설 수는 없다. 요컨대 ‘문단’이 ‘문학적으로’ 할 일은 거의 없다고 할 수 있다.
물론 ‘문학 외적으로’ 할 수 있고 해야 마땅한 일들은 많다. 노벨문학상 수상을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니라, 전 세계에 우리 문학과 문화를 알려 세계 문화의 발전에 이바지한다는 맥락에서 그러하다. 한국 문화에 대해 한국의 보통사람들보다 훨씬 깊이 있는 이해를 보이는 임마누엘 페스트라이쉬 교수의 말대로, 우리 문화의 ‘전통’과 ‘깊이’를 외국에 적극적으로 홍보하는 일, 한국의 문학 고전이 갖는 매력을 해외에 알리는 일에 문학 관계자들은 물론이요 정부까지 적극 나설 필요가 있다. 다양한 방면에서 이러한 노력이 지속되어 한국문화의 도도한 저력을 외국인들이 알게 될 때, 바로 그러할 때에야 노벨문학상도 따라올 것이다(<한국인만 모르는 다른 대한민국>).
이러한 사실을 생각하면, 문단에서 누구를 띄워 노벨문학상을 기대해 본다거나 한두 작가를 내세워 한국 문학을 해외에 알리자는 발상은 전혀 문학적이지 못한 한심한 생각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 감추고 싶은 사실을 은폐하는 변명 정도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의심된다. 문학적이지 않은 다른 목적이 있다는 혐의를 지울 수 없다는 점, 이것이 셋째 문제이다.
터놓고 말하자면, 상업주의적인 욕망을 가리는 방식으로 그러한 이야기가 떠돌게 된 측면이 있다고 하겠다. 예를 들어 하루키의 소설 번역본이 나올 때마다 책의 띠지를 장식했던 노벨문학상 운운의 문구들을 떠올려 보면, 한국 문학계에서 ‘노벨문학상’이라는 ‘카피’로 소비자를 유인해 온 적이 없다고는 할 수 없다. 베스트셀러를 만들어 돈을 벌고자 하는 기획의 일환으로 노벨문학상을 운위하는 것이야말로, 문학예술의 장에서 자본의 가장 적나라한 대리인으로 행동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베스트셀러를 만들기 위해 행해지기도 했던 더 추악한 사실들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베스트셀러를 지향하는 자체가 문단의 한 모습이라는 사실이 부끄럽다. 표절 문제를 계기로 바로 이러한 태도를 반성할 필요가 있다.
문단의 말석을 차지한 채 25년 정도 한국문학을 연구하고 가르쳐 온 입장에서 볼 때, ‘문단 권력’이나 ‘상업주의’ 등보다 이 말이 훨씬 충격적이었다. 내가 놀란 것은 그러한 지적이 허황된 것은 아니리라는 판단에서이다.
앞의 진단을 일반화해 보자면 다음과 같다.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를 배출하기 위해서는 가능성이 보이는 작가를 문학계가 띄워 주어야 하며, 그의 명성에 흠이 갈 만한 사항이라면 그것이 불거지지 않게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말이 되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전체적으로 보아 말이 되지 않는다는 것은 누구라도 알 수 있으니, 이에 대해서는 아까운 지면을 쓰지 않는다. 여기에서는 앞의 판단 곧 ‘노벨문학상 수상을 위해 문학계가 가능성이 보이는 작가를 키워야 한다’는 생각에 대해서만 이야기해 본다.
이러한 발상은 세 가지 점에서 문제적이다.
첫째로 지적할 것은 노벨문학상에 대한 태도상의 문제이다. 노벨문학상이 있을 때도 되었다는 생각, 한국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탈 때가 되었다는 바람, 일본은 두 번이나 탔고 중국도 노벨문학상 수장 작가를 배출했으니 우리나라도 노벨문학상을 꼭 가져야 한다는 강박 등이 모두 문제적이다. 어떠한 논리를 갖다 붙이더라도 이는 ‘상을 타기 위해 문학을 한다’는 말이 아니기 어려운데, 이러한 말이야말로 상품과 자본의 논리, 시장의 질서를 반성해 온 문학 정신과는 어울릴 수 없는 까닭이다.
노벨문학상이 꼭 있어야 하는가? 그렇지 않다. 노벨문학상 수여 현황이 보여주는 문학 외적인 요인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1901년 처음 시행된 이후의 수상자 국적을 보면 서구가 아닌 나라의 문인이 상을 받은 경우는 불과 10여 차례밖에 되지 않는다. 이렇게 114년 동안 112명을 배출하면서 서구인들이 100회 가까이를 독식한 상이라면, 수상 작가 선정 기준을 의심하는 일을 먼저해야 마땅한 일이다. 적어도 노벨문학상 수상에 연연할 일은 전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우리나라에서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가 나온다면 좋은 일이라는 점이야 부정할 것이 아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그 방법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둘째 문제로 꼽을 만하다. 노벨문학상은 문학계의 사람들이 특정 작가를 띄워 주는 방식으로 기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려고 준비하듯 경쟁을 통해 누구를 발굴하고 그를 키워 주고 해서 될 일은 전혀 아니라는 말이다. 문학예술작품의 빼어남과 가치는 운동선수의 역량처럼 비교를 통해 측정될 수 있는 것도 혹은 경매의 낙찰가로 매겨질 수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문학전문가들이 ‘비문학적인 발상’을 했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
노벨문학상은 따라오는 것이어야 한다. 훌륭한 우리 문인의 작품이 국제적으로 널리 알려져 진가를 인정받게 되면 자연스럽게 수상자가 나올 것이다. 따라서 한국 문단 차원에서 문인들이 할 일은, 한편에서는 좋은 작품을 열심히 쓰고, 다른 한편에서는 다양한 작품들의 특징과 경향을 엄정하게 논하는 것뿐이다. 여력이 있다면 외국 문인들과의 교류를 마다할 이유가 없지만, 그것이 앞설 수는 없다. 요컨대 ‘문단’이 ‘문학적으로’ 할 일은 거의 없다고 할 수 있다.
물론 ‘문학 외적으로’ 할 수 있고 해야 마땅한 일들은 많다. 노벨문학상 수상을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니라, 전 세계에 우리 문학과 문화를 알려 세계 문화의 발전에 이바지한다는 맥락에서 그러하다. 한국 문화에 대해 한국의 보통사람들보다 훨씬 깊이 있는 이해를 보이는 임마누엘 페스트라이쉬 교수의 말대로, 우리 문화의 ‘전통’과 ‘깊이’를 외국에 적극적으로 홍보하는 일, 한국의 문학 고전이 갖는 매력을 해외에 알리는 일에 문학 관계자들은 물론이요 정부까지 적극 나설 필요가 있다. 다양한 방면에서 이러한 노력이 지속되어 한국문화의 도도한 저력을 외국인들이 알게 될 때, 바로 그러할 때에야 노벨문학상도 따라올 것이다(<한국인만 모르는 다른 대한민국>).
이러한 사실을 생각하면, 문단에서 누구를 띄워 노벨문학상을 기대해 본다거나 한두 작가를 내세워 한국 문학을 해외에 알리자는 발상은 전혀 문학적이지 못한 한심한 생각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 감추고 싶은 사실을 은폐하는 변명 정도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의심된다. 문학적이지 않은 다른 목적이 있다는 혐의를 지울 수 없다는 점, 이것이 셋째 문제이다.
터놓고 말하자면, 상업주의적인 욕망을 가리는 방식으로 그러한 이야기가 떠돌게 된 측면이 있다고 하겠다. 예를 들어 하루키의 소설 번역본이 나올 때마다 책의 띠지를 장식했던 노벨문학상 운운의 문구들을 떠올려 보면, 한국 문학계에서 ‘노벨문학상’이라는 ‘카피’로 소비자를 유인해 온 적이 없다고는 할 수 없다. 베스트셀러를 만들어 돈을 벌고자 하는 기획의 일환으로 노벨문학상을 운위하는 것이야말로, 문학예술의 장에서 자본의 가장 적나라한 대리인으로 행동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베스트셀러를 만들기 위해 행해지기도 했던 더 추악한 사실들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베스트셀러를 지향하는 자체가 문단의 한 모습이라는 사실이 부끄럽다. 표절 문제를 계기로 바로 이러한 태도를 반성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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