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기업 지배구조 개선…‘제2엘리엇’막아라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안이 우여곡절 끝에 주주총회를 통과했다.
지난 17일 서울 양재동 at센터에서 열린 삼성물산 임시 주주총회에서 제일모직과의 합병안은 의결권 있는 투표참여 주식수 1억3235만5800주 중 9202만3660주(69.53%)의 찬성으로 가결됐다.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 매니지먼트의 공격으로 난항을 겪어온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이 가까스로 통과된 것이다. 이로써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법인이 오는 9월1일 출범한다.
사실상 그룹의 지주회사가 되는 새로운 삼성물산은 의식주휴(衣食住休)·바이오 선도기업으로 거듭나겠다는 청사진을 그릴 수 있게 됐다.
이번 엘리엇 사태는 우리사회에 많은 의미를 던져주었다. 무엇보다 한국 시장이 예전처럼 해외 투기자본에게 호락호락 당하지 않는다는 점을 알리는 계기가 됐다.
그동안 우리 자본시장을 노리는 해외 투기자본의 침투는 끊이지 않았다. 그때마다 한국경제는 매번 해외 투기자본의 공격에 무너졌고, 수조원에 이르는 국부가 유출됐다.
‘론스타’의 외환은행 인수, ‘소버린 펀드’의 SK그룹 공격, ‘칼 아이칸 펀드’의 KT&G 공격 등이 대표적이다. ‘투기자본의 먹잇감’으로 일컬어질 정도로 우리 자본시장은 단기 시세 차익을 노리는 투기자본에게 손쉽게 이용돼 온 게 사실이다.
하지만 이번 사태는 예전과는 다른 결과를 만들어 냈다. 이날 표 대결도 당초 예상됐던 박빙 결과가 아닌 합병 찬성 69.53%의 삼성 ‘압승(壓勝)’으로 끝난 것도 국익 훼손 시도에 대한 철저한 응징이라는 상징적인 의미도 지닌다.
이날 삼성물산 주주총회에 참석한 한 주주도 “우리나라는 과거 소버린·론스타 사태로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며 “개인적으로는 (합병 비율에) 불만이 있지만 국익을 생각하면 합병에 찬성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이번 사태는 국내 대기업들에게도 큰 시사점을 남겼다. 대기업의 부당한 경영권 승계나 오로지 지배주주의 이익을 위한 행위에 대해선 시장이 철저하게 검증하고 격렬하게 거부하는 움직임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투기자본의 공격도 문제지만 빌미를 제공하는 허술한 지배구조가 더 문제라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지적이다.
이번 사태를 계기로 한국기업의 고질적인 병폐인 ‘기업지배구조 문제’를 개선하려는 움직임을 보여야 한다는 것이다. 자본시장연구원 황세운 실장은 “우리 기업들의 지배구조 취약성 때문에 글로벌 헤지펀드들의 표적이 된 측면이 있다”면서 “그동안 대기업들이 지배구조 개선에 대한 필요성은 인식하면서도 많은 비용을 들여야 한다는 이유 때문에 고치려는 적극성을 보이지 않았고, 그러다 외국계 헤지펀드들의 공격이 들어오면 부랴부랴 대응하려는 모습을 보여왔다”고 지적했다.
황 실장은 “현재 경영권 분쟁의 소지가 있는 기업들이 이미 관찰이 되고 있어 제2의 엘리엇 사태가 일어날 가능성은 굉장히 높아 보인다”며 “헤지펀드의 공격에 따른 경영권 분쟁이 시사하는 바는 사후대응보단 사전예방이 중요하다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실제 삼성그룹 엘리엇의 공격을 받고 나서야 배당성향을 30%로 높이고 거버넌스위원회를 신설하는 등의 주주친화 정책에 나섰다. 삼성맨 출신인 금융투자협회 황영기 회장도 “이번 사태를 통해 대기업들은 부당하게 경영권을 승계하려 한다거나 지배주주의 이익만을 위한 행동을 했을 때 외국인이나 소액주주들로부터 큰 불만을 살 수 있다는 메시지를 받았을 것”이라며 “메시지에 담겨 있는 교훈을 잘 되새기며 앞으로 대기업들은 주주가치 제고를 위해 배당정책이나 주주친화적인 프로그램들을 만들어야 한다”고 밝혔다.
일각에서는 차등의결권제, 포이즌필 등 경영권 방어 수단을 강화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하지만 재벌들의 지배구조 개선과 주주친화적인 정책 노력이 전제되지 않은 상황에서 이같은 제도가 재벌들을 위한 특혜라는 지적도 적지 않다.
금융투자업계의 한 관계자는 “포이즌필, 차등의결권 도입은 주주친화적인 경영구조 정착과 더불어서 갈 때 가능할 것”이라며 “외국은 우리나라처럼 이런 지배구조들의 취약성 이슈들이 부각된 상황에서 도입된 것이 아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