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삐딱한 인문 정신’ 선언
‘삐딱한 인문 정신’ 선언
  • 정태영 기자
  • 승인 2015.07.22
  • 호수 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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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준 포스텍 인문사회학부 교수
대체로 규범을 지키되 나는 될 수 있는 대로 좀 더 자유롭게 살고자 노력한다. 남에게 해를 끼치는 것이 아니라면, 남들이 다 (해야) 한다고 해서 내가 하기 싫은 것을 하지는 않는다. 나 자신의 생활 리듬에서든 내가 속한 집단이 갖고 있는 규율 차원에서든, 나 스스로 숨 쉴 틈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그런 것이 삶이라고 나는 믿는다.

모두가 똑같이 산다면 그것은 인간의 삶이 아니다. 개성을 죽이고 획일성을 앞세우는 경우라면 그 정도야 어쨌든 인간성을 말살하는 전체주의 사회라 할 것이다. 널리 알려진 SF들을 이용해 말해 보자면, 그 구성원이, 조지 오웰의 <1984>(1949)가 그렸듯이 우리와 같은 사람이되 세뇌된 경우든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1932)가 보여 준 것처럼 공장에서 만들어지는 새로운 인간이든 버나드 베켓의 <2058 제네시스>(2006)가 놀랍게 형상화했듯이 말 그대로의 기계든 간에, 모두가 획일화된 그러한 존재들로 이루어진 사회는 인간의 사회라 할 수 없다.

물론 현대사회의 누구라도 제 뜻대로 살 수만은 없다는 사실은 명명백백하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사실 ‘주체(subject)라는 이데올로기’에 빠져 있는 경우라고 해야 할 것이다(알뛰세르,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적 국가 장치>). 우리들 모두 현재 자신의 모습에 이르기까지 ‘자신(만)의’ 의지로 모든 역경을 이겨온 것은 아니라는 사실만 떠올려도, 내가 내 삶의 주체라는 생각이 한낱 허위의식[이데올로기]임이 분명해진다. 공동체 구성원 일반이 지켜야 하는 사회·역사적 규범으로서의 윤리의 맥락에서 볼 때 모두가 자기 요구의 즉각적인 충족을 지연시키는 ‘현실 원칙’(프로이트, <정신적 기능의 두 가지 원칙>)을 체득해야 하는 것도 따로 설명이 필요하지 않다.

이렇게 ‘사람살이의 근본적인 차원에서’ 어느 누구도 자기 식대로만 살 수는 없다고 해서, 인간의 삶이 동일성을 지향해 왔다고 본다면 오산이다. 말 그대로의 동일성 상태란 어떠한 변화도 허용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사실이 그랬다면 문화와 문명의 발전 자체가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정은 정반대다. 발터 벤야민이 ‘모든 문명의 기록은 곧 야만의 기록’이라고 갈파했듯이(<역사철학테제>) 모든 새로운 문명은 기존의 것을 파괴해 왔고, 문화의 발전이란 언제나 차이를 풍부하게 하면서 이루어져 왔다.

요컨대, 어느 누구도 자기 식대로만 살 수는 없지만, 모두가 동일한 방식으로 살기만 하면 그것은 인간의 삶도 인간 사회도 아니요 문화나 문명의 발전도 바랄 수 없다고 할 수 있다.

인문학이 밝혀 주는 이러한 사태, 동일성이 아니라 차이가 중시되는 이러한 사실들을 어떻게 볼 것인가. 나는 적극적으로 긍정한다. 거기에 자유의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약간 소극적으로 들릴지 몰라도 엄밀하게 말하자면, 바로 그러한 상황에서야 내가 하고 싶은 바를 할 수 있는 기회 혹은 가능성이 말살되지 않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사정에서, 나는 가능한 대로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며 살고자 한다.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싶은 방식으로 행하는 삶을 지향하는 것이다(물론 남을 해치지 않는다는 전제 위에서임을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밝혀 둔다). 남이 하라고 했기 때문에 하지는 않는 삶을 살려는 것이다.

그 결과로 나는, 밀란 쿤데라의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사비나’가 그랬듯이, 사람들을 한데로 모으는 ‘깃발’을 좋아하지 않는다. 동일한 맥락에서, 저 유신시절 ‘새마을 운동’이 좋은 예가 되는 바 집단적 규율의 강제를 나는 혐오하고, 예컨대 국내 유수의 대기업들이 행한 금연 정책의 폭력에 냉소를 보낸다. 공동체의 이익에 반하며 자신의 이해관계와도 무관하게 지배 이데올로기에 휘둘려 플래카드를 내세우는 군중들에게서 인간성의 상실을 보고 한탄한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따위의 말을 앞세워 사람 살이의 본성이 드러나는 전통과 역사를 무시하고 자신이 새로 맡은 조직을 자기 식대로 완전히 뜯어고치려는 모든 레벨의 리더들을 경멸한다.

동일한 결과로 나는, 텔레비전의 각종 연예 프로그램이나 드라마 들을 보지 않는다. 의복에서 레저에 이르기까지 세상을 횡행하는 온갖 유행으로부터 거리를 두고, 그것을 조장하는 상품광고들에도 눈길을 주지 않는다. 프랜차이즈 커피숍이나 식당의 브랜드에 둔감한 상태를 의식적으로 유지하며, 책을 읽어도 베스트셀러는 일단 외면하고 안목 있는 사람들이 읽어 볼 만하다고 할 때에야 비로소 구매 여부를 고려한다. 영화는 말할 것도 없어서, ‘천만 관객’ 운운하면 우선 거리를 두고 본다.

삐딱하다면 삐딱하다 할 이러한 태도를 생활의 모든 면에서 무작정 취하고 볼 뿐이라면 공감을 얻을 수 없는 아웃사이더나 냉소주의자 혹은 현학과 허세를 앞세우는 속물에 불과하겠지만, 그런 것은 아니다.

넓은 의미에서의 각종 정치 행위나 우리 사회의 소비사회적인 특성 및 대중문화 일반에 대해 거리를 두고 비판의 눈길을 유지하는 것은, 그것들과 달리 우리가 계속 소중히 여겨야 한다고 믿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서두에서 밝힌 대로 개개인의 자유가 그것이다.

문화의 건강성을 유지하고 문명의 발전을 가능케 하는 차이를 만들어 낼 자유, 획일화를 조장하는 권력에 맞서 나 그리고 우리가 각각 그러한 차이들의 보유자로 존속할 자유를 위해서 삐딱함이 요구되기에 그러한 태도를 취하는 것뿐이다. 근본적으로 말하자면, 삶의 모든 영역을 지배하며 획일화를 강제하는 자본에 맞서 인문학이 일깨워 주는 그러한 자유와 그것에의 의지 자체를 유지·발전시키려는 긍정적이고도 적극적인 의지에서 나의 삐딱함이 나온다고 하겠다. 삐딱한 인문 정신의 선언은 이렇게, 사회에 의해 강제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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