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골과 유행, 그리고 르시클라주
단골과 유행, 그리고 르시클라주
  • 정태영 기자
  • 승인 2015.07.29
  • 호수 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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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준 포스텍 인문사회학부 교수
나는 매식을 자주 한다. 이유는 두 가지다. 저녁식사 시간 즈음해서 아내의 일이 있고, 나는 음식 만드는 데 소질도 의향도 거의 없기 때문이다. 이런저런 일들로 생기는 회식이 적지 않은 것도 이유가 된다. 이렇게 매식을 많이 해도 내가 찾는 식당은 몇 군데 안 된다. 먹고자 하는 음식에 따라 찾아가는 단골집이 정해져 있는 까닭이다.

매식 품목마다 단골집을 정해 두다시피 하게 된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지만, 제일 중요한 점은, 이러한 방식이야말로 내가 나 자신의 삶의 양식(style)을 갖추는 한 가지 방법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입맛에 맞는 음식을 계속 찾게 되는 일반적인 이유나 뜨내기손님에게 행해지기 쉬운 푸대접을 피하고자 하는 우려도 없지는 않지만, 이보다는, 단골을 정해 두는 상태가 ‘나’를 ‘나’로 유지해 준다고 믿는 점이 더 큰 것이다.

다른 여러 사회생활의 양상들과 마찬가지로, 음식 문화 또한 사람을 규정한다.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먹는가가 그 사람의 특성을 말해 주는 것이다. 길거리 떡볶이에서부터 최고급 레스토랑의 만찬까지 모든 음식을 두루 경험해 보아야 한다고 학생들에게 강조하지만, 그런 경험은 이미 해 보았기에, 평소의 나는 내 스타일대로 단골집의 음식을 취한다.

일반적으로 내가 즐기는 것은, 대체로 중간 가격에 주방장이 직접 정성껏 준비한 질박한 음식들이다. 식당으로 치자면, 조용하게 먹을 수 있는 깨끗한 곳, 이것이 유일한 기준이다. 요컨대 나는 음식의 유행이나 식당의 외양 및 이름이 아니라 음식의 질과 식당의 분위기를 본다. 적절한 질과 편안한 분위기, 이것이 내 단골집의 기준이다. 이상에 더하여, 더 중요한 것으로, ‘단골손님’으로서 식사를 한다는 사실을 나는 중시한다. 단골집을 마련해 두는 사실 자체가 의미를 갖는다고 굳게 믿는 것이다.

‘나의 단골 문화’는 두 가지에 저항한다. 유행과 르시클라주가 그것이다. 이러한 저항의 바탕에는 삶의 양식[style]에 대한 지향이 있다.

한때 와인이 유행한 적이 있다. 와인의 종류와 맛에 대해 한바탕 늘어놓을 수 있는 지식(?)을 갖춰야 사교적이라 생각되는가 싶을 만큼, 많은 사람들이 와인을 수집하고 와인 바를 찾아다니곤 했다. 얼마 전에는 그 자리를 사케가 차지하더니, 근래에는 하우스 맥주가 유행인 듯싶다. 이러한 흐름과는 무관하게, 나는 항상 소주를 사랑한다. 커피도 그렇다. 나는 하루에 다섯 잔 내외의 커피를 마시지만, 전국에 퍼져 있는 커피 전문점들에는 거의 가 본 적이 없고 그런 곳에서 파는 각종 메뉴를 구별할 줄도 모른다. 사무실에서 원두로 내린 아메리카노나 에스프레소만을 마실 뿐, 전 세계적인 체인을 갖고 있는 브랜드나 메뉴를 소비하지는 않는 셈이다.

이렇게 나는 유행과 거리를 둔다. 겉으로 드러나는 행태 차원에서 남들과 같게 행동하면서 귀속감을 느끼고 싶어 하지는 않는다. 타인들과의 소통을 지향하되 타인과의 동질감을 희구하지는 않는다. 내 취향은 나만의 것이고, 그러한 나의 취향이 나를 나로 존속하게 해 준다고 믿는 까닭이다.

내가 나로서 존재하(려)는 것을 놔두지 않는 것, 유행이란 그런 것이다. 일찍이 분석되었듯이, 유행은, 동일한 외양을 통해 내적으로는 하나로 결집되고 외적으로는 다른 계층들과 구별되려는 사회계층의 특징이 나타나는 현상이다. 이렇게 모든 유행은 계급유행이다(게오르그 짐멜, <돈의 철학>).

우리 시대의 유행이란 자신의 실제를 가리고 상위 계층을 욕망하게 하는 측면이 한층 강해졌다는 점도 강조해 두자. ‘짝퉁 명품’의 유행이나 성형 열풍 등이 좋은 예가 된다. 이러한 유행들은 ‘현재의 나 자신’을 ‘소망하는 나’로 덮어씌우게 부추기는데, 이 모든 과정이 소비를 키우려는 자본의 욕망에 따른 것임은 물론이다. 그 결과로, 개성을 살린답시고 유행을 따르면 따를수록 개성이 사라지는 역설적인 상황이 전개된다. 개개인들의 동질화된 ‘가짜 정체성’이, 그 역시도 자본의 놀이 마당인 상징 공간 곧 각종 소비 공간과 가상공간 등에 펼쳐질 뿐이다.

자신만의 단골을 유지하는 것은 이렇게, 자본의 욕망과 함께 하는 유행과 거리를 두며 삶의 양식을 추구하는 일이 된다. 자신의 행동에 의미를 부여해 주는 것으로서의 양식, 자잘하게 단편화되고 해체된 오늘날의 문화 상태로 타락하기 이전의 총체적인 삶의 양식(앙리 르페브르, <현대세계의 일상성>)에 대한 개인 차원의 한 가지 추구 방법이 바로 단골 문화라 할 수 있다.

단골손님으로서 단골집에 찾아가 주인과 인사를 나눈 뒤 음식을 ‘대접받듯이’ 먹고 나오는 일은, 판매자와 아무런 관계도 없는 단순 소비자로서 상품을 구매하고 가격을 지불하는 행위와는 질적으로 다르다. 후자가 자본 순환의 대리인의 행위일 뿐인 데 비해, 전자는 생활을 인간관계로 영위하는 산 사람의 활동인 까닭이다.
동일한 맥락에서 나는, 사회의 도처에서 행해지는 ‘진보도 발전도 아닌 의미 없는 변화’들에도 저항한다. 스스로를 자신에 맞춰 재교육[르시클라주: recyclage]시키라고 강제하면서 그렇게 적응하지 않는/못하는 사람들을 도태시키는 현대사회의 조직 원칙, 소비문화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이러한 흐름(장 보드리야르, <소비의 사회>)에 맞서서, 내가 유지할 수 있는 것들만큼은 유지하고자 노력한다.

식생활에 있어서 단골문화를 지키려는 것은, 나 자신을 끊임없이 개조하라는 르시클라주 명령에 맞서서 구매자로서의 소비자로 전락하지 않고 전통적인 이용자로 남고자 하는 노력이다. 유행에 휘말려 자본의 놀이에 소진되지 않고, 삶의 양식을 회복하려는 힘겨운 노력의 일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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