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각의 병과 이야기의 힘
망각의 병과 이야기의 힘
  • 정태영 기자
  • 승인 2015.08.19
  • 호수 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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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준 포스텍 인문사회학부 교수
건망증에 관해서라면 누구나 한 번쯤 남에게 재미있게 말할 만한 경험을 해 봤을 것이다. 자동차 키를 차에 꽂아두고 내렸다는 식으로 모두가 겪어 볼 만한 일 말고, 차를 갖고 왔다는 사실을 깜빡해서 택시를 타고 귀가했다든지 하는 경우 말이다. 놀랍고도 기가 막힌 일이지만 그것이 반복되지 않는 한, 이러한 사례들은 친구들과의 이야기꽃을 활짝 피우는 데 유용한 재미있는 경험에 그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정도가 심해져서 위와 같은 일이 반복된다거나 하면 사정이 달라진다. 자주 보는 친구나 친척을 바로 알아보지 못하거나, 어떤 일을 해 놓고도 했는지 여부를 몰라 다시 하거나 혹은 했는지 아닌지를 확인해야 한다거나, 하고 싶은 말이나 표현을 금방 떠올리지 못하거나 하는 일 등이 잦다면 문제가 심각해진다. 치매를 의심해 볼 만한 상황인 까닭이다.

치매(dementia)는 뇌 기능 손상에 따른 인지장애 질환으로서, 개인의 삶은 물론이요 가족의 평화와 사회의 안녕을 해치는 심각한 문제이다.

65세 이상의 노인 인구가 늘면서 이러한 위험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 이미 우리나라 노인의 치매 유병률은 주목할 만한 수준에 이르러, 2008년 8.4%, 2010년 8.6%, 2012년 9.1% 54만여 명으로 지속적으로 늘고 있다.

지난 2000년 고령화 사회(65세 이상 인구가 전체의 7% 이상)에 진입한 우리나라는 2026년이면 초고령사회(20% 이상)로 진입하게 된다 하므로(통계청 <장래인구추계>, 2011), 노화에 따른 치매의 위험이 국가 차원의 실제적인 문제가 되는 것은 시간문제일 뿐이라 하겠다.

치매가 국가 사회 차원에서 위험한 이유는 중장년층에서도 환자가 급증하고 있다는 데서도 찾아진다. 2002년과 2009년을 비교해 보면 40대 치매 환자는 1.8배, 50대의 경우는 2.9배 증가했다고 한다(보험개발원, <건강보험 통계분석자료집>, 2011).

이렇게 상황도 전망도 어두운 반면 국가 사회 차원의 대책은 미흡한 것이 현실이다. 2008년부터 국민건강보험공단에서 노인장기요양보험을 시행하고는 있지만, 치매 노인 중 이 보험의 혜택을 받는 경우는 32%에 그치고 있으며 일상생활에 상당 부분 지장을 초래하는 중등도 이상의 치매 환자만이 보험을 적용받을 수 있는 상황이다(한국보건사회연구원, 2014). 국내 치매 환자의 72%는 가족이 돌봐 준다고 하니(조선일보, 2012.10.31), 국가 사회의 문제를 가족에 떠넘기고 있는 형편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치매 환자를 돌보는 가족 구성원의 고통과 어려움은 잘 알려져 있다. 치매 환자를 등장시키는 문학작품들 대부분이 환자를 돌보는 가족의 고통에 초점을 맞춰 온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박완서의 <집 보기는 그렇게 끝났다>(1978)의 경우 치매에 걸린 시어머니의 횡포를 묵묵히 참아내던 며느리가 끝내 시어머니를 가족이 아니라고 생각하게까지 되는 상황을 핍진하게 형상화한 바 있다.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2008) 또한 가족 구성원들의 죄책감과 회한을 잘 보여주고 있다.

고령사회로 진입해 가는 상황에서 치매의 문제, 노인의 문제에 국가 사회가 잘 대처하지 못하고 있는 이러한 상황은 우리나라 노인 자살률이 OECD 국가 중 1위라는 불명예를 낳는다. 2008~2011년 기간 우리나라의 61세 이상 노인의 연평균 자살자는 4,700명으로 전체 자살자의 32.7%를 차지했다. 이는 인구 10만 명당 80.3명으로 일본의 27.9명, 스웨덴의 16.8명, 프랑스의 28.0명에 비해 3배 정도나 높은 수치이다(한국보건사회연구원, <인구 고령화 경제적 영향 분석 및 고령화 대응지수 개발>, 2015).

지금까지 길게 살펴보았듯이 고령사회로 접어들고 있는 우리나라에서 치매는 사회 구성원 모두의 관심을 요하는 심각한 문제이다. 의과학 분야에서 각종 치매에 맞는 치료 방법들을 계속 연구하고, 정부와 의료계 차원에서 보다 효과적인 치료 및 처치 방안을 확충해야 함은 물론이지만, 그것만으로 끝날 일이 아니다. 국민 개개인의 예방 노력이 병행되는 외에, 인문학 쪽의 기여 또한 가능해 보이는 까닭이다.

치매의 증세가 기억력 감퇴만은 아니지만 그것이 망각의 병임에 틀림없는 이상, 의도치 않은 망각에 저항하는 방법의 구축 면에서는 인문학 역시 제 몫을 갖는다.

인문학을 이루는 문학과 역사에 공통되는 ‘이야기’의 힘이 그것이다.

이야기란 인간의 삶과 문화를 가능케 해 주는, 인간이 지니고 있는 보편적인 능력이다(최시한, <스토리텔링, 어떻게 할 것인가>). 인간만이 구사하는 꾸며진 이야기는 실제 사회적 상황을 빠르게 이해하도록 해 주며, 이 능력을 집중적이고 적은 비용으로 유지할 수 있게 해 주기도 한다(브라이언 보이드, <이야기의 기원>).

이처럼 보편적인 기능에 더하여 이야기는, 어떠한 사태를 잘 기억하게 하는 효과적인 방법이기도 하다. 동서양 고대의 문학이 구비 전승되면서 기억력의 발달에 기여한 점이나, 고대 그리스의 기억술이 로마 시대에 오면 웅변술을 위한 ‘수사학적 기억술’로 발전한 사실(임경순, <기억술과 근대과학>, 이진우·김민정 외, <호모 메모리스>) 등이 이야기의 이러한 효과를 잘 보여 준다.

이야기의 이러한 기능은 치매 예방과 관련해서도 주목할 만하다. 치매 증상의 발현이나 경과를 늦추는 좋은 방안이 두뇌 활동 능력을 증진시키는 데 있음은 거의 모든 의사들이 공통으로 지적하는 사실이다. 기억을 포함하는 정신 능력이 풍부할수록 치매에 따른 손상에 저항하며 정상적인 정신 기능을 발휘할 여지가 커진다는 말이다. 따라서 이야기의 부흥 및 이야기를 근간으로 하는 인문학의 부흥이야말로, 노령사회로 진입해 들어가는 시점에서 한층 더 긴요해진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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