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사회에서의 민주주의를 위하여
대중사회에서의 민주주의를 위하여
  • 정태영 기자
  • 승인 2015.09.02
  • 호수 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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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준 포스텍 인문사회학부 교수
서울시청 광장에 사람들이 모여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목소리를 높이는 장면을 보지 않고는 한 계절을 지내기 어려운 시대에 살고 있다. 하나의 주장이 내세워지는 반대편에 그것을 지워버리려는 듯이 또 다른 목소리가 맞세워지는 양상 또한 심심찮게 보는 형편이다. 가상공간에서도 사정이 다르지 않아, 상반되는 주장들이 진영이 나뉜 듯 서로 세를 모으려 애를 쓰는 것을 쉽게 볼 수 있다.

객관적으로 볼 때, 이는 민주주의 사회이기에 벌어지는 양상이라 할 것이다. 다수의 의사가 공동체 전체의 운명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정치 체제를 떠받치고, 사회정치적으로 중요한 문제의 결정에 있어 여론의 향배가 항상적인 변수가 되게 하며, 따라서 대중을 교화하고 그럼으로써 여론의 지지를 이끌어내는 것이 언제나 초미의 관심사가 되게 하는, 민주주의의 원칙이 바탕에 깔려 있는 사회이기에 가능한 현상이다.

‘민주주의(democracy)’라는 말 자체가 ‘사람들[민(民), demo-]’을 핵심으로 하고 있으니 위에 언급한 모든 양상들이 당연하고도 자연스럽다고 할 법도 하지만, 그렇지만은 않다.

앞에서 암시적으로 표현했듯이 여론이나 대중 자체가 조종되고 교화되는 대상이기도 한 까닭이다. 직접적으로 말하자면 실제 현실에서 보는 ‘사람들’의 속성이 가장 이상적인 형태의 민주주의가 상정하고 있는 그러한 사람들만은 아니기 때문이며, 터놓고 다시 말하자면, 현실의 ‘사람들’이 민주주의를 민주주의가 되게 할 ‘주인’의 자질을 언제나 확실하게 발휘하지는 못 한다는 혹은 않는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는 까닭이다.

요컨대 민주주의라는 이념이 ‘자율적인 개인 주체’를 상정하는 반면 현실 세계의 사람들이 그만큼 자율적이지는 않다고 할 수 있기에,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들이 등장하고, 더 나아가서 그러한 사람들이 서로 나뉘어 대치하는 바람직하지 못한 형국이 벌어지기까지 하는 것이라 하겠다.

이러한 양상으로부터 되짚어 올라가면, 우리 시대 사람들의 특성을 ‘대중’에서 찾지 않을 수 없다. 모두가 동의하듯이 우리가 대중사회에 살고 있으므로 이는 필지의 경로이기도 하다.

대중이 학자들의 관심사가 되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말의 유럽에서인데, 대체로 부정적인 존재로서 즉 ‘군중(crowd)’으로서 분석되었다. 이 방면의 가장 영향력 있는 저술은 구스타브 르봉의 <군중심리학>(1895)인데, 1960년대 중반까지 계속 간행되면서 대중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크게 심화시켰다. 그에 따라서, 대중이란 ‘본능적 야만으로의 회귀’와 ‘선동자-조작자의 제안에 대한 굴복’을 특징으로 하는 비이성적인 행태를 보이는 집단이라는 인식이 널리 퍼진 것이다. 이에 맞서서 ‘혁명적 군중들’에 주목하는 조르주 르페브르 등의 연구가 있었지만(이상의 정리에 대해서는, 조르주 르페브르, 최갑수 옮김, <1789년의 대공포>, 까치, 2002에 있는 자크 르벨의 <소개의 글> 참조), 사정이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다.

대중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은 철학 분야에서도 사정이 다르지 않다. 스페인의 형이상학자인 가세트의 경우, ‘대중(mass, multitude)’과 ‘엄선된 소수(select minority)’를 구분하여 20세기 초 대중사회를 진단한 바 있다. 대중의 부정적인 속성이 인간 사회 전반에 퍼지는 현상이 그가 파악한 문제이다. 현재 상태에 안주한 채로 자신을 발전시키기 위해서 어떤 노력도 하지 않는 인간 유형인 대중, 욕망도 생각도 삶의 방식도 남과 같은 상태에 있으며 사회 각 부문이 요구하는 특수한 능력을 갖추지는 않는 그러한 대중이, 바로 그러한 부문의 운명을 결정하는 역할을 차지하는 것이 대중사회의 문제이다(José Ortega y Gasset, <The Revolt of the Masses>, 1932).

사람들을 대중과 엄선된 소수로 나누는 가세트의 방식을 경계하고 자신의 군중관에 비추어 참여민주주의를 부정하는 르봉의 극단적인 태도는 배척한다 해도, 이들이 밝혀 준 대중의 부정적인 속성 자체에 눈을 감아서는 안 된다. ‘국회의원의 수준이 국민만 못하다’든지 ‘기업은 이류고 관료는 삼류, 정치는 사류’라는 등의 말이 공감을 얻을 만큼,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대중적인 인간들이 위세를 떨치는 사회가 되어 버린 까닭이다. 부정적인 대중성이 이미 우리 사회의 전 영역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것이다.

실상은 갈데없는 ‘대중’이되 ‘엄선된 소수’인 양 스스로를 속이고 허세를 부리는 이들이 거의 모든 영역에서 활개를 치는 상황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어찌해야 할 것인가.

‘사람을 보지 말고 정신을 봐야 한다’고 나는 주장한다. 개인이 아니라 시스템이 사회정치적인 문제 해결의 주체가 되어야 하고, 권력자의 자의가 아니라 다수의 지지에 의해 지탱되는 권위에 의해서 정책이 결정되어야 한다는 데 동의한다면, 앞의 주장을 인문학자의 소박한 생각으로 치부하지는 말아야 한다.

우리 각자가, 누가 말하는가가 아니라 말이 올바른가를 따지는 데 집중해야 한다. 판단의 틀을 바꾸어, 말의 주체가 권력자인가 지식인인가가 아니라 말의 내용이 진리인가 지성적인가를 문제시해야 한다. 더불어, 판단의 기준에서 ‘다수’를 지우고 그 자리에 ‘올바름’을 내세워야 한다.

사정을 곰곰이 따지고 보면, 시민들이 광장에 나서고 가상의 공간이 여론의 각축장이 되어 버린 사실 자체도 대중성이 지배하는 현실의 결과라 할 수 있다. 따라서 행동을 앞세우기 전에, 우리 시선의 초점, 의식의 대상을 제대로 바꾸는 일이 필요하다. 이것만이 현재 시점에서 민주주의를 지키는 길이라고 나는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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