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준 포스텍 인문사회학부 교수
1991년 대학 강단에 처음 선 이래, 그리고 10여 년 전 이공계 연구중심대학에 적을 둔 이후 줄곧 나는 내 전공에 국한하지 않고 가능한 대로 폭넓은 분야를 가르치려고 노력해 왔다. 문학에 대한 다양한 강좌를 개설하는 것은 물론이고, 작문이나 토의·토론 등은 물론이요 공부하며 가르치는 격으로 과학커뮤니케이션이나 문화콘텐츠, 스토리텔링 등도 다루고 있다. 현란하다면 현란한 강좌 이력을 쌓아 왔다 할 만한데, 이는 두 가지에 기인한다. 하나는 세상과 인간의 삶에 대한 호기심이 많은 나의 개인적인 성향이고, 다른 하나는 건강한 문화에 대한 나의 믿음이다. 문화란 모름지기 서로 차이를 보이는 다양한 요소들이 공존할 때, 바로 그러할 때에만 발전을 기약할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러한 성향과 믿음에 따라, 문학 교육의 대상을 다양하게 함과 더불어, 인문학 일반이나 과학문화, 문화산업 분야에까지 손을 뻗쳐 관련 강좌를 개설해 온 것이다. 이들 강좌를 준비하는 것이 곧 폭넓은 문화생활을 영위하는 것이라는 생각으로, 힘이 들어도 힘들다는 생각을 별로 해 본 적이 없다. 반대로, 가끔씩 낯선 문화 산물을 대하면 신선한 충격을 받고 관련 공부의 첫걸음을 떼게 된다.
근래의 그러한 경험은 <어둠의 공포(fear(s) of the dark)>라는 흑백 애니메이션 영화 한 편에서 왔다. 다섯 개의 에피소드와 하나의 추상적인 그래픽, 총 여섯 부분으로 이루어진 옴니버스 형식의 이 작품은, 그래픽 아티스트와 만화가 등 6인의 감독이 공동으로 작업해 2008년에 개봉한 것이다. 선댄스 영화제를 비롯한 독립영화제들에서 호평을 받은 사실에서 간접적으로 확인되듯이, 이 영화는 할리우드나 스튜디오 지브리 식의 대중적인 애니메이션과는 판이하게 다른 유형의 작품이다.
‘프랑스 영화답게(!)’ 뭘 말하는지 알기 어려울 만큼 난해하지만, 감독의 작가정신이 빛나는 예술영화는 아니다. 어둠을 공통 요소로 하여 공포를 자아내는 조금씩 빛깔이 다른 기발한 이야기들을 병치함으로써 두려움에 대한 환상과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있는데, 두려움을 유발하는 것이 알려지는 순간 호러가 액션으로 변화되는 사정을 고려하면, 이 영화의 난해함이란 두려움을 두려움으로 유지하고자 하는 장르 코드적인 수준의 것이라 할 만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매우 신선한 충격을 준다. 그 바탕에는, 감탄사를 터뜨리지 않을 수 없을 만큼 예술적으로(!) 그려진 장면들과 그것들이 기묘하게 이어지는 완벽한 기술이 자리하고 있다. 터치가 많이 가 누가 봐도 대단히 공을 들였음이 분명한 에피소드뿐만 아니라 선이 단순한 경우도 화면의 전환이나 정서의 표현에 있어 장면들마다 감탄을 자아낼 만큼 고도의 기술이 자연스럽게 구현되어 있다. 무장무애(無障無碍)라 할 만한 이러한 기술적인 완성도가 앞서 말한 난해함과 어우러지면서 이 영화에 특유의 예술 장르적 성격을 부여해 준다 하겠다.
물론 기술 자체가 예술성을 담아내는 것은 아니지만, 기술이 고도화되면 그 자체로 기예(技藝)가 되어 예술에 가까워지는 것 또한 엄연한 사실이다. 미술이나 음악은 물론이요 문학에서도 새로운 경향의 등장이 기술적인 전환과 밀접히 관련되는 것은 이러한 연유에서이다. 후기인상파 회화나 무조음악(無調音樂), 모더니즘문학 등이 널리 알려진 좋은 예다. 기술의 새로움이 예술 장르의 지향 속에서 이루어짐으로써 무언가를 추구하는 효과를 놓치지 않을 때, 예술로서 새로움의 차원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어둠의 공포>는 고급스러운(?) 예술영화와 호러 장르를 배경으로 하는 대중 애니메이션의 중간에 놓여 있다고 할 만하다. 본격문학과 대중문학이니 클래식과 대중음악이니 하는 이분법을 애니메이션 영역에서 해체하는 작품인 셈이다. 음악계에서는 ‘크로스오버’를 통해 문학계에서는 ‘중간소설’ 등으로 불리는 작품의 등장으로 이러한 경향이 좀 더 일찍 그리고 널리 퍼져 있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었지만, 그에 상응하는 잘된 애니메이션은 처음 접하는 터라 기쁨과 놀라움이 적지 않았다.
이 놀라움에 따라 공부(!)의 길로 약간 나아가면서, 종이책을 매체로 하는 유사한 경향이 판타그래픽스 북스(Fantagraphics Books)를 통해 이미 1980년대에 펼쳐졌음을 확인하게 되었다. 1991년에 발표된 <쥐>(권희섭 역, 아름드리, 2002)로 널리 알려진 아트 슈피겔만이나, 미국 사회에 대한 자기 고유의 시각을 과감하게 드러내는 로버트 크럼 등의 새로운 만화 세계가 앞서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만화가, 만화와 소설의 경계를 흐리는 장르 곧 ‘그래픽 노블(graphic novel)’과 이어진다는 계보도 그려 보게 되었다. 알란 무어와 데이비드 로이드의 <브이 포 벤데타 (V for Vendetta)>(1982)(정지욱 옮김, 시공사, 2008)가 고전적인 대표작인 이 분야는, 보스니아 내전을 다룬 <안전지대 고라즈데>나 인티파다(Intifada)의 현장을 그린 <팔레스타인>(두 작품 모두, 함규진 옮김, 글논그림밭, 2002) 등을 펴낸 조 사코의 강력한 현실 참여적인 작품까지 포함하며 장르의 경계를 넓히고 있다.
단편적으로 접했던 작품들을 이렇게 묶어서 바라볼 수 있게 되면, 문화 향유의 폭넓음을 지향하는 면에서 성취감을 느끼는 한편 문화의 폭넓음을 새삼 실감하면서 느끼는 막막한 아득함 또한 어쩔 수 없게 된다. 더 나아가면 본격적인 공부가 되니, 바쁜 생활 중에 망양지탄(亡羊之歎)을 어쩔 수 없는 까닭이다. 작은 소개를 겸하는 이 글이, 문화생활과 공부가 뒤섞인 직업을 갖지 않은 독자 분들께서 새로운 문화 영역을 즐겁게 열어 가는 마중물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
저작권자 © 안전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