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준 포스텍 인문사회학부 교수
근래 우리는 두 죽음을 맞이했다. 정부의 대학총장 간선제 방침에 대한 반발로 부산대의 한 교수가 투신자살하는 일이 있었고, 터키의 한 해변에서 세 살밖에 안 된 시리아 꼬마의 시체가 발견된 일이 그것이다. 반응은 상이했다. 우리나라에서 벌어진 앞의 사건은 연일 불거지는 다른 사건에 묻혀 가고 있는 반면, 아시아대륙 반대편에서 발생한 뒤의 사건은 선진 자본주의 사회 전체를 자성으로 이끌고 있다.
시인이자 중견 국문학자인 고(故) 고현철 부산대 교수의 투신자살은 대학사회에서 유례가 없는 일대 사건이다. 그의 자살은, 일개 대학의 총장 선출 방식을 문제시한 것이 아니라, ‘진정한 민주주의 수호의 최후의 보루’인 대학의 민주화를 촉구하면서 ‘민주주의에 대한 의식’이 무뎌져 가는 현재의 세태에 온몸으로 저항한 것이다.
이 일로 해서 부산대가 총장 직선제를 유지하기로 결정했고 일부 대학의 교수들이 그러한 움직임에 동참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했지만, 사실상 그것이 다인 듯싶다. 문제의 원인을 만든 교육부가 어떠한 공식적인 입장을 표명했다는 소식을 나는 읽은 바 없고, 고인이 진정으로 우려했던 바 사회의 민주화 후퇴 문제에 대해서 정치계가 어떠한 반응을 내놓았는지 들은 바가 없다.
반면 그리스로 넘어가려던 한 시리아 난민 가족의 막내인 에이란 쿠르디(Aylan Kurdi)의 죽음은, 유럽 각국이 난민들에게 문호를 열게 하는 실제적인 변화를 끌어내고 있다. 순진무구한 어린 생명을 앗아간 것이, 바다에서 전복된 보트와 냉정한 파도가 아니라 일상에 묻혀 있던 자신들의 무관심이라는, 선진 자본주의 국가와 국민들의 자각과 자성이 고조된 까닭이다.
엄연한 죽음이라는 공통점을 갖는 이상의 두 비극과 그에 대한 반응이 상이하다는 점을 주목하면 근래 우리 사회 현실의 근본적인 문제가 의식된다.
‘감각의 무뎌짐’, ‘감각의 둔화’가 그것이다.
우리들의 감각이 갈수록 둔화되고 있다는 진단은 주변을 둘러볼 때 역설적이라고 생각될 수도 있다. 우리 모두 감각적인 자극이 가득 찬 일상에 놓여 있는 까닭이다. 지하철 플랫폼에 들어서기만 해도 비어 있는 벽을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각종 광고와 안내문들이 우리의 시선을 끌고, 대중매체들 또한 우리의 감각을 자극하는 내용들을 연신 쏟아내고 있다.
이러한 요인들이 우리를 자극하여 충동적이고 즉각적이며 수동적인 반응을 이끌어낸다. 현란한 광고나 쇼윈도 디스플레이에 이끌려 충동구매를 하는 경우가 얼마나 흔한지, 텔레비전 앞에 앉아서 자신이 보는 것이 무엇인지를 헤아려 보지 못하는 경우는 또 얼마나 일상적인지 따로 설명할 여지도 없다.
이렇게 다양한 감각적 자극이 끊임없이 강화되면서 그러한 감각 자극이 실제로 의미하는 바에 대한 우리의 의식은 그만큼 약화되는 사태가 가속되고 있다. 감각이 자극의 단순한 수용에 더하여 그에 대한 주체의 반응까지 포함하는 것임을 생각하면, 이러한 현상이야말로 감각의 둔화에 다름 아니다.
사회 차원에서 확인되는 이러한 감각의 둔화는 대단히 문제적이다. 사회적 감각의 둔화는, 사회 문제에 대한 주체적이고 비판적인 사고의 저하, 마땅히 함께 기뻐하고 슬퍼해야 할 일들에 대한 공감 능력의 마비, 요컨대 이성적인 사고 능력의 둔화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사회적 감각의 둔화는, 현대 기술 문명이 강제하는 일반적인 현상이기도 하다. 저마다 곡진한 사연이 있는 각종 사건을 동일한 지면에 배치하는 신문이라는 매체가 사건들 각각의 의미를 따져 헤아리고 공감하는 능력을 크게 위축시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에 더하여 CNN이나 YTN 같은 실시간 뉴스 보도의 발전은, 실제 현실의 문제를 단순한 볼거리로 전락시키는 데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인류의 문제를 보되 자신이 무엇을 보는지 생각하지 못하게 되는 이러한 양상이 기술 문명의 고도화와 더불어 전 세계적인 현상이 된 것은 애석하게도 맞는 진단이지만, ‘보되 알지 못하는’ 이러한 상태가 우리나라에서 한층 심한 데는 다른 이유도 빼놓을 수 없다.
우리의 지적 무감각을 조장하는 사회 양상이 그것이다. 우리의 정치인들이 말을 공허한 수사로 전락시켜 온 것이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지만, 근래에는 한걸음 더 나아가 있다. ‘유체이탈식 화법’이라 불리는 언어 조작을 통해 우리를 미혹시키면서 웰즈가 <1984>에서 말한 ‘이중사고’를 강제하는 데까지 이른 것이다. 자신들의 행동과 정반대되는 언어를 아무런 거리낌 없이 구사함으로써, 말의 뜻뿐만 아니라 실제 자체를 흐리고 우리의 사고를 멍한 무감각 상태에 빠뜨리고 있다.
그러한 결과로 우리는, 과거에 우리들이 지향해 온 가치들 현재에도 여전히 지향해야 마땅한 가치들이 심각하게 훼손되어도, 그것을 보되 보지 못하는 상태에 깊이 빠져 들어가고 있다. 국가의 근간을 이뤄야 할 민주주의 원리, 공동체의 안녕을 뒷받침해 주는 윤리, 개개인 삶을 올바로 이끌 도덕이나 문화생활을 풍요롭게 해 줄 세련된 예술 등에 대해 무감각해진 상태로 나날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세월호 이후 사태에 대한 무심함, 민주주의의 후퇴를 경고하는 고현철 교수의 죽음에 대한 무지와 외면, 경제 문제로 인한 사회적 위화감의 증대에 대한 둔감함 등에까지 생각이 미치면, 이러한 무감각이야말로 우리 사회 공동체의 심각한 문제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의 이러한 무감각이 그대로 이어진다면 사회 구조가 결코 발전적으로 변화될 수 없다는 점에서, 이러한 무감각은 범죄라 해도 전혀 과장일 수 없다(이희원, 『무감각은 범죄다 -‘저항의 미학’으로서 성 미학』, 이루,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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