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과 자유, 그리고 교과서
인문학과 자유, 그리고 교과서
  • 정태영 기자
  • 승인 2015.09.23
  • 호수 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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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준 포스텍 인문사회학부 교수
‘인문학자는 모두 자기 잘난 맛에 산다’고 말해 볼 수 있다. 문학, 역사, 철학으로 이루어진 인문학(Humanities)의 특성상 그러한 면이 강하다.

문학작품이나 작가와 관련된 제반 사항을 연구하는 문학(연구)을 보면, 연구자마다 자신이 훌륭하다고 생각하는 이상적인 문학형을 가지고서 그에 따라 대상에 대한 해석과 평가를 내린다고 할 수 있다. 어떠한 작품이 언제 발표되었는지 등은 사실 차원의 문제이므로 이론의 여지가 거의 없지만, 그러한 사실의 확정은 문학 연구의 기초에 해당될 뿐이다. 그 위에서 행해지는 가치 평가는 연구자에 따라 상이한 양상을 띠기 마련이다.

역사도 마찬가지이다. 고려의 건국과 멸망, 임진왜란의 시기 같은 것은 사실(史實)이기 전에 사실(事實)이어서 새삼 연구할 대상이 아니다. 그러한 사실들의 의미를 따지면서 사태의 전개 양상을 통시적으로 재구성하는 일이 역사가들이 하는 일이다. 그렇게 ‘구성된’ 것이 우리가 접하는 역사이며, 이 또한 역사가들 개개인의 사관에 따라 크든 작든 상을 달리하기 마련이다.

모든 학문의 어머니이며 엄밀한 사고의 학이라 할 철학도 예외가 아니다. 주변의 철학사를 훑어보기만 해도 동일한 사정이 금방 확인된다. 존재에 대한 이해에서 극단적으로 대립되는 관념론과 유물론, 보편적인 존재를 인정하느냐 여부로 나뉘는 실재론(實在論)과 유명론(唯名論), 인식론 차원에서 서로 대립하는 경험주의와 합리주의 등만 떠올려도, 하나의 철학 이론이 말 그대로 보편적으로 인정을 받는 것은 아님을 알 수 있다.

요컨대 인문학자들은 저마다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연구를 하고 그 성과를 발표한다. 너무도 단순하게 사태를 기술했지만, 이러한 지적이 진실을 왜곡하는 것은 아니다.

자연과학 또한 사정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도 덧붙여 둔다. 과학자의 일이 진리의 왕국을 탐사하듯이 우주와 자연의 신비를 하나씩 파헤치는 것이라는 생각이 잘못된 것임은 일찍이 토마스 S. 쿤이 <과학혁명의 구조>에서 밝혀준 바 있다. 새로운 이론에 의해 기존의 이론이 대체되는 식으로 과학의 발전이 이루어지며, 이론들이 경쟁하는 상태가 과학혁명들 사이에 놓인다는 것이다.

요컨대 학문이란 진리를 찾으려 노력하는 것이지만, 어느 때든 하나의 분과 학문 전체가 단일한 목소리를 내는 경우란 없다고 하겠다. 서로 다른 주장들이 각각 자신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경쟁하면서 학문이 유지·발전되는 것이다. 따라서, 서로 다른 해석과 가치평가 들이 뒤섞여 있는 상태가 학문의 정상 상태이며 바로 그러할 때에만 학문적인 발전도 보장된다고 하겠다.

여기까지 와서 보면 인문학자뿐 아니라 거의 대부분의 학자들이 자기 잘난 맛에 산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그러한 상태에 있을 때에야 학문의 발전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학자들이 서로 제 목소리를 내는 상황을 우리 모두 반갑게 기쁘게 받아들여 주어야 한다.

이러한 사정을 새삼 돌이켜보는 것은 ‘역사 교과서의 국정화’ 문제 때문이다.

정부와 여당이 국사 교과서를 국정화하려 하고 있음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뉴라이트 계열의 학자들이 펴낸 교과서를 여당 대표가 앞장서서 옹호하고 홍보했음도 대부분의 시민들이 잘 기억하고 있다. 그 위세 탓인지 이제는 교육부의 장차관과 국사편찬위원장까지 나서서 국사 교과서의 국정화를 추진하고 있다.

현재의 국사 교과서들이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들이 있고 그들을 대변하는 학자들이 있으면, 그들이 자신들의 지향에 맞는 교과서를 만들면 된다. 민주주의 사회이므로 누구도 그것을 막을 수 없다. 교학사 교과서가 바로 그러한 사례이다. 이념적 지향성 이전에 사실 관계에서부터 오류가 너무 많아 학계와 교육계의 질타를 받고 결국 학교 현장에서 선택받지 못했지만, 자신들의 지향이 소중한 것이라면 계속 노력하여 좋은 교과서로 발전시키면 된다.

다른 교과서들도 그렇지만 국사 교과서 또한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다시 쿤의 말을 빌리자면, 교과서는, 학계의 지배적인 이론이 자신의 틀에 맞추어 학문의 역사를 다시 쓰는 작업의 결과이다. 따라서 교과서의 종류가 다양하다는 사실은, 어느 한 이론이 절대적인 지배력을 행사하지 않고 세부에서 서로 차이를 보이는 이론들이 공존하고 있음을 증명해 주는 것이다. 학문의 발전이 끊임없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증거라는 말이다.

사정이 이러하기에 국사 교과서의 국정화는 독재 정권에서나 하는 독단적인 행태라고 할 수 있다. 말이 과격하지만 옳은 말이다. 교육부 차관과 국사편찬위원장이 과거에 했던 말인데, 누가 말했든, 옳기 때문에 옳은 말이다. 대단히 유감스럽게도 그들 자신이 지금은 바로 그 ‘독재 정권에서나 할 법한 독단적인 행태’를 추진하고 있지만 말이다. 이들의 놀라운 변화를 염두에 두면, 현재의 사태란 위정자 자신들의 이념적 지향에 맞게 국민들의 역사의식을 교정하려는 욕망에서 빚어진 것이라고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다시 말하지만 역사의 진실은 다양한 학자들의 끊임없는 노력에 의해 서서히 밝혀지고 부단히 재구성되는 것일 뿐이다. 따라서 역사 교과서의 국정화 시도는, 역사 해석의 다양성을 말살하고, 그러한 해석들을 산출하는 데 신명을 바치는 역사학자들의 존재를 무시하며, 이 모두의 바탕에 있는 인문정신을 위협하는 행위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인문학자들이 더 이상 저 잘난 맛에 살지 못하게 하는 전혀 창조적이지 못한 발상이기도 하기에, 한 명의 인문학자로서, 이 시대착오적인 시도가 하나의 해프닝으로 마감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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