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바 ‘노벨상 시즌’이다. 근래 들어 매년 그랬듯이 언론 한 귀퉁이가 ‘왜 우리는 노벨상이 없는가’라는 주제의 글들을 싣고 있다. 일본이 연이어 노벨 물리학상을 받고, 중국이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한 탓(?)에, 올해의 진단에는 부러움과 자조의 빛깔까지 더해졌다.
노벨상 관련 글들이 항상 지적하는 것은 간명하다. 과학 분야의 노벨상을 타고자 한다면 기초과학 분야에서 묵묵히 꾸준히 연구하는 과학자들에 대한 국가 차원의 지원이 거의 무조건적으로 그리고 지속적으로 있어야 한다는 것. 논문 편 수를 따지고 가시적인 성과와 산업적 효과를 강조하는 현재의 과학계 풍토 속에서는 노벨상을 탈 만한 연구를 진행하는 것 자체를 기대할 수 없다는 것 등등.
모두 옳은 말이다. 과학계뿐만 아니라 문학 분야에서도 십분 옳은 말이다. 이렇게 옳은 지적들이 계속되는데도 불구하고 그러한 지적이 실현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사실 이에도 명확한 진단과 답이 내려져 있다. 국가사회 전반에 걸쳐 당장 그 성과를 측정할 수 있는 것만을 중시하고, 그러한 성과 판단의 근저에는 거의 언제나 경제적 수익 가능성에 대한 질문이 놓여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경제적인 관점에서’ 과학과 학문, 예술에 대한 지원과 관리가 행해지는 까닭이다. 2013년 기준 국가 R&D 예산이 국민총생산의 4.15%로 세계 최상위를 자랑하지만 그 대부분이 이공계에 집중되어 있으며 그 속에서도 산업계와의 관련성이 높은 연구에 우선적으로 지원되는 현실이 이를 증명한다.
‘미래의 먹거리’를 만들어 낼 분야에 대한 투자가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먹거리’ 곧 경제적 이윤 문제에만 목을 매어서는 결코 기초과학에 대한 확실한 투자를 지속할 수 없고 의미 있는 문학예술이 산출될 토양을 갖출 수 없다. 경제적인 이윤으로 좁혀서 생각하더라도 그 효과가 당장 드러나는 것만을 생각해서는 미래를 기약할 수 없다. 따라서 따지고 보면, 순수한(!) 기초과학의 발전도 미래 어느 시점에서는 막대한 이윤을 창출하는 보고가 될 수 있으며, 순수한 문화예술의 산물이 인류 문화의 자산이 되면서 막대한 부를 일구어 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생각지 않는 단견이 문제라 하겠다.
이러한 사태의 근본적인 원인은 무엇인가. 인간의 삶에서 가치를 갖는 다양한 것들을 경제라는 하나의 관점에서 성급하게 재단하는 풍조를 들지 않을 수 없다. 개인의 취향이 존중되어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할 수 있는 문화가 취약한 상태, 모든 사람들에게 돈 잘 벌기만이 요구되고 그에 따라서 인생의 성패가 결정되다시피 하는 상태가 문제인 것이다. 이와는 반대의 상태를 선진 사회라 한다면, 모든 구성원을 ‘돈 버는 기계’로 몰아가고 돈만이 가치의 척도인 양 여기는 우리 사회의 후진성이 노벨상 부재의 원인이라 할 만하다.
문제를 이렇게 확대해서 보면, 노벨상을 꼭 타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식으로 넘어갈 수는 없다. 노벨상 수상이 절대적인 과제일 수 없다는 것이야 자명하지만, 노벨상을 탈 만한 사회 분위기를 갖추는 것이 중요하다는 데 동의한다면 사회를 발전시키는 노력 차원에서 이 상의 수상 가능성을 높이는 방안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 까닭이다.
결론을 당겨 말하자면, 경제와 무관한 삶의 목적들 또한 사회 구성원 각각에게 자연스럽게 설정될 수 있는 사회 상태가 되어야 한다. ‘비경제적인 목적을 가진 사람들도 경제적으로 문제가 없는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상태’가 마련되어야 하는 것이다. 최소한, 경제적인 이득을 낳는 것은 아니라 해도 사회 공동체에 꼭 필요한 일들을 하면 국가 사회가 나서서 경제적인 보상을 해 줄 수 있는 그러한 사회여야 한다.
농업이나 순수예술을 예로 들어 본다. 국가의 안녕에 농업이 필수적이라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는다면 수익성이 떨어지는 농가에 국민의 세금으로 소득을 보전해 줄 수 있어야 한다. 각 분야 예술가들의 활동이 문화의 발전에 자양분이 된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는다면, 푼돈으로 생색을 내는 예술인 복지 정책을 내세우기보다는, 그들이 임대해 살고 있는 공간에서 함부로 쫓겨나지 않을 수 있는 그런 기초적인(!) 시스템부터 갖춰야 한다.
무엇보다도, 이러한 주장을 두고 포퓰리즘이니 좌파니 하는 맹목적인 단견부터 근절할 필요가 있다. 앞에서 든 바 농민에 대한 국가의 지원 사례는 이미 독일이 시행하고 있는 정책이며(<알면 알수록 놀라운 독일 농촌의 ‘비밀’>, 오마이뉴스, 2015.9.28),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을 예방하며 임차인들의 거주권을 보호하는 정책은 유럽의 여러 선진국은 물론이요 미국의 뉴욕에서도 행해지는 일이다(<월세 밀려도… 佛 겨울철엔 ‘방 빼’ 못 한다>, 동아닷컴, 2015.10.10).
경제적인 이윤보다 ‘공동체의 안녕이라는 기준’을 앞세우고 자산가의 이윤 추구 권리보다 ‘사회 구성원의 주거권 일반’을 존중하는 사회, 경제 논리를 누르는 공동체 논리가 작동하는 이러한 사회가 필요하다. 바로 그러한 사회에서야 돈 되는 일이 아니라 해도 자신의 신명을 바쳐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게 될 것이며, 바로 그러할 때에만 노벨상 같은 것이 기려 주는 의미 있는 과학의 성과, 예술의 성취들 또한 기대할 수 있다.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경제 논리 지상주의를 뒤엎을 수 있는 정신 즉 ‘인간다운 삶과 공동체의 안녕을 앞세우는 인문정신’의 구현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의 선진국으로 나아가고 그에 걸맞은 성취를 기대할 수 있는 첫걸음이라고 나는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