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혓바닥 인간’의 시대
‘혓바닥 인간’의 시대
  • 정태영 기자
  • 승인 2015.10.28
  • 호수 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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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준 포스텍 인문사회학부 교수
나의 일상에 소중한 기쁨이 되는 일 중 상당수는 음식과 관련되어 있다. 아내가 직접 만들어 주는 만두나 김밥 같은 특식(!)을 온 가족이 조금씩 거들면서 함께 먹게 될 때, 그것은 작지만 기억에 남는 이벤트다. 차례나 제사를 맞아 모두 나서서 제 역할을 한 뒤에 그 음식을 먹을 때 그것은 단순한 한 끼가 아니다. 말 그대로 제의의 일부여서 거기 걸맞은 의미를 함께 갖는 까닭이다. 가족의 생일이나 결혼기념일, 크리스마스 등에 특정 음식을 특별히 먹는 일 또한 고유의 의미를 갖는 일이다. 가족 중에 좋은 일이 생겨서 평소와 달리 멋진 외식을 하게 될 때도, 음식을 먹는 일은, 살기 위해 필요한 영양분을 섭취하거나 맛을 탐하는 것과는 다른 일이 된다.

이러한 경우들에서 한 끼의 식사는 단순한 ‘먹는 일’과는 질이 다른 행위가 된다. 누구와 먹는지, 어떻게 먹는지, 어떤 생각과 이야기를 나누는지, 먹고 나서 무엇을 기억하는지 등이 모두 어우러진 복합적인 행사이기 때문이다. 그 결과 이러한 식사는, 생물학적인 수준을 넘어 문화의 차원으로 상승한다. 가족 내에서 상징적인 의미를 짙게 띠는 문화적 기억의 중요한 매체가 되는 것이며, 보다 넓게 근본적으로 말하자면, 생존의 적나라함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인간적인 삶의 한 국면이 되는 까닭이다.

음식문화는 중요하다. 비단 가족 내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사회생활 전반에 걸쳐 그러하다. 우리 모두 일상의 경험을 통해 알고 있듯이, 함께 음식을 먹는 일은 일정한 친밀감이나 동질감이 전제될 때에나 가능하다. 동시에, 그렇게 음식을 함께 하면서 친밀감과 동질감이 강화되는 것 또한 물론이다. 요컨대 우리의 일상에 있어서 음식을 먹는 일은 우리가 속한 가족이나 사회 집단의 문화의 한 요소로 기능하고 있다. 혼자 허기를 달래며 허겁지겁 밥을 먹을 때가 없지는 않겠지만, 우리의 생활 대부분에서 음식의 섭취는 상징적인 의미와 뗄 수 없는 문화 활동의 일환이다.

이상과 같은 일반적인 의미에서만으로도 음식문화에 대한 성찰이 없을 수는 없는데, 요즈음의 우리 상황을 보면 그러한 필요성이 한층 강화된다. ‘음식 열풍’이라 해도 전혀 과장일 수 없는 상황이 펼쳐지고 있는 까닭이다. 텔레비전 방송 채널마다 음식과 관련된 프로그램들이 넘쳐나고 있다. 온갖 연예인들이 나와 음식을 만들어 먹으며 떠드는 모습이 화면을 장식하고, 각종 요리 전문가와 요리사들이 스타가 되었다.

음식 관련 프로그램들 또한 크게 변화하였다. 전통적인 요리 프로그램은 조리법을 알려주는 데 목적을 두고 그에 충실한 양상을 보였다. 따라서 출연진 또한 요리사와 보조 진행자로 단출했다. 이와는 달리 현재의 프로그램들은 대체로 먹거나 평가하는 과정까지 보여준다. 그 결과 출연진 또한 시식자들이 대거 포함되고 요리를 담당하는 사람이 요리사에 한정되지 않는 방식으로 크게 확장되었다. 이러한 변화 위에서, 먹고 마시고 떠드는 모습을 보여주는 방식이 대세가 되었다. 요리를 제재로 하되 경연(contest)을 펼친다든가 생존(survival) 게임적인 요소를 가미한다든가 하는 변주도 활발해져 그 양상 또한 한층 다양해졌다.

요컨대 요리가 인기몰이를 하는 대중문화 프로그램이 된 사회에 우리가 살고 있다. 요리의 이러한 대중문화화는 대중문화의 문제적인 속성을 짙게 띰으로써 몇 가지 문제를 낳는다.

요리 경연 프로그램들을 먼저 살펴보면, 앞서 말한 대로 삶의 필수적인 행위이자 문화 활동인 요리를 승부욕을 부추기면서 오락용 볼거리로 전락시킨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 경우의 근본적인 문제는 존중되어야 할 차이를 무시한다는 데 있다. 소수 전문 심사위원이나 아마추어의 취향으로 판정(?)을 내리는 형식 속에서, 요리들의 다양성과 질적인 차이가 무시되는 것이다. 요리들이 갖는 지방적인 성격, 재료의 차이에 따른 특성, 특별한 의례나 제의적인 성격에 맞추어진 문화적인 특성, 코스에서의 순서에 따른 기능상 차이 등등이 제대로 존중되지 못하고, 공정성을 찾기 어려운 ‘맛’으로 모든 것이 결정될 뿐이다. 음식이 갖는 다양한 의미와 기능을 무시한다는 점에서 이들 프로그램은 텔레비전의 바보상자적인 성격을 강화시키는 오늘의 대표주자라고 하겠다.

대부분의 요리 강습 프로그램들 또한 적지 않은 문제를 보인다. 조리 과정의 현실적인 성격을 숨기고 음식을 오락용으로 탈바꿈시키는 까닭이다. 이들 프로그램에서는 대체로 재료의 구입이나 손질 과정, 조리에 걸리는 시간, 식후의 처리[설거지] 등이 생략된다. 그 결과로 요리가 본래 갖고 있는바 생존을 위한 노동이라는 성격이 사라진다. 이렇게 가사노동의 실제를 가리고 그 중요한 의의를 희석시킴으로써, 궁극적으로는 가사노동으로서의 요리(하기)의 의의를 약화시키고 부정하는 기능을 한다. <삼시세끼>와 같은 새로운 형태의 요리(?) 프로그램 또한, 상황이 비일상적이라는 점에서 일상 노동으로서의 요리(하기)를 왜곡하기는 마찬가지다.

이러한 지적을 과하다고 보는 사람이 적지 않을 수 있지만, 이는, 인문학의 성찰이란 그렇게 작고 사소해 보이는 일이 갖는 인간적, 문화적인 의미를 따져 보는 일이며 그렇기 때문에 소중한 것이라는 사실이 인정받지 못하는 사회 풍토를 증명해 줄 뿐이다. 방송상의 특성을 무시했다고 비판할 수도 있겠지만, 그러한 비판은 초점을 잘못 잡은 것이다. 방송이 갖는 제한적인 속성은, 요리가 방송에서 다루어질 경우 조리법 소개 수준에 머물러야 한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일 뿐인 까닭이다.

이들 프로그램이 대표하는 ‘요리의 상품화’ 현상은 우리를 퇴행시킨다. 식문화가 인간의 삶에서 차지하는 위상에 대한 고려의 여지는 없앤 채로 음식을 만들어 먹는 행위에 관심을 집중시킴으로써, 맛있게 먹(는 데 몰두하)는 인간, 먹고 떠드는 인간 곧 ‘혓바닥 인간’으로 우리를 몰아간다. 식문화의 다양한 의미를 미각의 차원으로 축소함으로써, 우리의 문화를 위축시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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