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업무상 질병자가 피해 구제를 위해 발병에 대한 인과관계를 직접 입증해야 하는 국내 상황에 대해 유엔 특별보고관이 우려를 표명했다.
유엔 인권최고대표사무소(OHCHR) 소속 배스컷 툰칵(Baskut Tuncak) 인권과 유해물질·폐기물 특별보고관은 지난 23일 서울 중구 플라자호텔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이런 내용의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한국 정부의 초청으로 방한한 툰칵 특별보고관은 지난 12∼23일 열흘 동안 전국을 돌며 유해물질·폐기물 피해자 및 관련 단체를 만나 피해실태를 조사했다. 이와 함께 S전자 등 기업관계자와 환경부 및 산업통상자원부 등 정부 부처와도 만남을 갖고 의견을 수렴했다.
이날 기자회견에서 툰칵 특별보고관은 “S전자 등 유해물질을 다루는 많은 기업의 근로자들이 인권보다는 이윤 추구를 우선순위에 두고 있어 우려스럽다”고 밝혔다.
이어 그는 “백혈병·림프종·유방암 등 피해자와 유족 등의 증언에 따르면 근로자들이 하루 12시간 유해물질을 접촉하는 환경에서 일하면서도 한 달에 하루 이틀밖에 쉬지 못했고, 유해물질에 대한 충분한 정보를 교육 받지도 못했다고 한다”고 말했다.
또 그는 한국 정부가 유해물질로 인한 발병의 입증 책임을 피해자에게 지우는 것도 문제점으로 지목했다.
참고로 우리나라의 경우 산재보험법 제37조에 따라 근로자가 업무상 질병을 주장하는 경우 그 업무와 재해 사이에 상당인과관계가 있다는 입증책임은 근로자에게 있다.
그는 “입증 책임이 피해자에게 있기 때문에 S전자 백혈병 피해자 60여명 가운데 단 3명만이 정부의 산재보상 대상이 된데다 그마저도 약간의 보상만 받았을 뿐”이라고 지적했다.
끝으로 그는 한국 정부가 비준한 국제인권비준조약과 헌법에 명시된 안전과 환경에 대한 권리를 언급하며, 한국 정부가 이들 권리를 보장하고 권리 실현을 위해 노력할 의무가 있음을 상기시켰다.
그는 “모든 사람을 보호하기 위해 법제를 만들어야겠지만, 특히 어린이, 비정규직 근로자, 이주근로자 등 취약계층을 보호하기 위한 강력한 법과 제도가 존재해야 유해물질로 인한 비극을 막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한편 특별보고관은 추가 실태조사와 사실 관계 확인 작업 등을 거쳐 권고사항 등을 담은 최종결과보고서를 내년 9월 유엔 인권이사회에 제출할 예정이다.
◇주요 선진국도 근로자가 입증책임 부담
이번 배스컷 툰칵 특별보고관의 기자회견에 대해 고용노동부는 법률에 의거 업무를 진행하고 있어 문제는 없으나, 그래도 근로자의 입증책임 완화를 위해서 지속적인 노력에 나서고 있음을 적극적으로 소명했다.
고용부는 지난 23일 발표한 해명자료를 통해 독일, 일본, 미국, 스웨덴, 캐나다 등 주요 선진국들도 근로자가 입증책임을 부담하고 있음을 밝혔다. 또 지난 6월 25일 헌법재판소가 업무상질병의 입증책임이 근로자에게 있다는 산재보험법 규정(제37조)이 헌법에 위반되지 않는다고 합헌 결정을 내린 사실을 언급했다.
고용부의 한 관계자는 “앞으로 고용부 및 근로복지공단은 업무상질병 인정범위 확대, 재해조사 역량강화, 질병판정위원회 전문성·공정성 강화 등을 통해 근로자의 입증책임 부담이 완화될 수 있도록 지속적으로 노력할 계획이다”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