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준 포스텍 인문사회학부 교수
기회 있을 때마다 하는 말이지만, 예술을 ‘제대로’ 감상하기 위해서는 필요한 지식들을 습득하고 관련 작품들을 감상하는 훈련을 지속적으로 해야 한다. 유홍준 선생의 책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를 통해 대중들에게 널리 퍼진 ‘아는 만큼 보인다’라는 말이 문화재뿐 아니라 예술의 감상에서도 어김없이 통하는 까닭이다.훌륭한 예술작품을 대하는 순간 섬광처럼 어떠한 감흥이 올 것이라 생각하는 것은, 저 옛날 낭만주의가 유포시킨 거짓말이다. 자전거 타기를 고생스럽게 배우고 난 뒤에야 자전거 타기를 즐길 수 있는 것처럼, 예술작품 또한 그것을 감상할 수 있는 안목을 기르기 위해 노력한 후에야 제대로 즐길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의 경험을 통해서도 어느 정도 확인된다. 클래식이 됐든 재즈가 됐든, 어떠한 음악을 즐겨 듣게 되기까지 우리가 ‘귀를 뚫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을 투자해 왔는지를 떠올려 보면 좋겠다. 많은 사람들이 공유할 법한 이러한 경우가 다른 모든 예술작품들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여행지의 미술관이나 박물관에서 그저 스쳐지나가며 보는 미술품들에서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해 본 경험 또한 많은 사람들이 해 봤을 터인데, 이는 동일한 사태의 다른 측면을 보여주는 것이다. 아는 바가 없으면 느낄 것도 적어지는 것이다. 좀 더 엄밀히 말하자면, 정작 느껴야 할 바를 느끼지는 못하고 자기 수준에 맞게 편의대로 느끼고 말게 되기 마련이다.
예술작품을 감상하는 것이 아니라 예술작품을 보는 경험을 해 볼 요량이면 그것도 나쁠 것은 없다. 그저 시간을 때우는 일환으로 예술작품을 봐 본다 해도 텔레비전의 오락 프로그램에 시간을 쏟는 것보다 멋져 보이는 효과를 기대할 수 있고, 또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 보면 약간의 공부도 되고 간혹은 제대로 공부해 보고 싶은 마음을 갖게도 되므로, 어떻게 봐도 안 좋은 일이라 할 것은 못 된다.
하지만 썩 만족스러운 일이 못 됨은 분명하다. A를 대하되 A가 아니라 B를 생각하는 것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이렇게, 예술작품을 대하면서 그 작품이 말하는 바를 오롯이 받아들이(려)는 것이 아니라 그 작품을 핑계로 하여 다른 것을 보게 될 때, 이러한 예술작품 수용 방식을 키치(Kitsch)라고 한다.
키치라는 말은 원래 ‘예술작품을 모방한 저속한 물품’을 가리키는 말이다. ‘나쁜 예술(bad art)’ 혹은 ‘예술 쓰레기’를 지칭하기도 하는데, 고결함과 성실성이 결여되었거나 감상적인 부르주아의 동경을 만족시켜 주는 그러한 예술적인 물품을 가리키기 위해 19세기 후반 뮌헨 미술 서클에서 비롯된 말이라 한다. 키치가 특정 대상을 지칭하기는 하되 키치로 분류되는 대상 자체가 끊임없이 바뀌기도 한다는 점에서, 키치를 이해하는 좋은 방법은 키치를 키치로 만드는 우리들의 자세를 주목하는 것이다. 이럴 때 키치란 ‘자기 향수(self-enjoyment)를 위해 환상을 창조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K. 해리스, <현대미술 -그 철학적 의미>, 서광사, 1988).
달리 말하자면 키치적인 태도란, 첫사랑에 빠진 소녀가 사랑하는 연인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가 사랑하고 있다는 그 정서 자체를 소중히 여기듯이, 욕구 대상이 아니라 욕구 자체에 관심을 두는 태도라고 할 수도 있다(조중걸, <키치, 우리들의 행복한 세계>, 프로네시스, 2007). 예술작품이 말하는 바를 거리를 두고 탐색하며 음미하는 대신에 예술작품을 통해서 자기가 보고 싶어 하는 것을 보는 태도, 로맨스 영화를 보되 성애 장면에만 탐닉하는 경우에서처럼, 예술작품을 보되 실상은 자신의 욕망을 볼 뿐인 태도가 키치인 것이다.
이러한 키치적인 태도가 우리 시대에 와서 크게 만연되고 있다. 한편으로는 문화와 소비 활동이 서로 겹쳐지게 된 상황에서 소비대상에 불과했던 사물이 문화의 담지자인 듯 되고, 한편으로는 키치적인 물품이 일련의 장식물로서 일상생활을 편안하고 여유롭게 만들어 주는 기능을 하게 되면서, 키치가 우리의 일상생활 깊숙이 침투하게 된 것이다(아브라함 몰르, <키치란 무엇인가?>, 시각과언어, 1995). 거실에 있는 다른 가구들과 전혀 어울리지 않으면서도 소장자의 만족이나 과시를 위해 놓인 골동품이나 그림 등처럼, 키치는 우리 주변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다양한 방식으로 손쉽게 구할 수 있는 복제품이 넘쳐나게 되면서, 이제 키치란, 미(美)가 구매 및 판매 가능한 것이라는 우리 시대의 환상에 따른 일반적인 현상으로서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는 환경이 되었다 하겠다(M. 칼리니스쿠, <모더니티의 다섯 얼굴>, 시각과언어, 1993).
이상과 같은 키치적인 태도는 여러 면에서 문제적이다. 예술의 질적 저하와 관련된다는 점에서 예술 분야에서 심각한 문제임은 물론이되 그에 한정되지 않는다. 키치가 근본적으로 자기 과시 욕구에 따라 발생하는 것이고 자기기만의 심리적 메커니즘을 통해 존속된다는 점에서, 그것은 우리 시대 문화 일반의 문제이자 인간성의 문제이기도 하다. 대상이 예술작품에 한정되지 않고 현대 문화의 제 산물은 물론이요 타인인 경우에서조차 키치적인 태도가 만연되고 있다는 점에서, 이러한 문제의식이 예술 전문가들만의 것이어서는 안 된다.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 데 있어서 상대방 자체에 주목하기보다는 그와 내가 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중시하는 태도, 대상[타인]이 아니라 나의 욕망[높은 사교성 혹은 멋진 인맥]을 앞세우는 이러한 태도가 바람직하지 못한 것임은, 생각해 보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쉽게 동의할 것이다. 그렇지만, 페이스북과 같은 SNS가 맺어 주는 인간관계의 실상이 이와 별반 다르지 않음을 깨닫고 있었는가 자문할 때,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은 것 또한 엄연한 사실이다.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키치적인 것에 대한 문제의식이 우리 모두에게 요청된다. 참된 인간관계의 발전과 공동체 문화의 향상을 염원하는 모두에게 말이다.
저작권자 © 안전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