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준 포스텍 인문사회학부 교수
두어 달 전에 이사를 했다. 대학에서 제공하는 숙소의 같은 동에서 두 층 위로 옮아간 것이니 이사다운(?) 이사는 아니지만, 태어나 말 배운 뒤 처음 집을 옮기는 중학생 딸애가 내내 소원으로 꼽았을 만큼 실로 오랜만의 이사였다. 딸애의 방을 그 또래 여자애 방답게 꾸며 아이의 기쁨을 크게 해 준 것을 포함하여, 벽지니 마루니 포함하여 인테리어를 어느 정도 고친 후 들게 되었다. 실로 바빠서 거의 손을 거들지 못한 내게 기댈 생각을 접고, 아내가 발품을 팔고 각각의 업자를 상대하는 갖은 고생을 하며 집을 그럴 듯하게 꾸며 내었다. 살림을 모두 옮기고 얼추 정리가 된 시점까지도 아내는, 일하는 중에 짬을 내어 스스로 시간과 에너지를 쏟아 부어 꾸민 집이건만, 그다지 행복해 하지 않았다. 무슨 이유인지 나도 본인도 콕 집어 낼 수는 없었지만, 여러 일에 치여 지내다시피 하는 남편이 새로 짜 넣은 책장의 책조차 정리를 하지 않을/못할 정도로 배돌았던 탓도 적지 않을 것이어서, 내 맘 또한 내내 편치 못했다. 그런 마음을 담아 그동안 수고했다며 꽃바구니 선물을 건넸을 때도 아내의 기쁨은 잠시뿐이었다.
그랬던 것이, 작은 물건을 하나 들여놓으면서 완전히 바뀌었다. 주방 싱크대의 한 곳에 소형 전자레인지 하나 정도 들어갈 크기의 수납공간이 비어 있었는데, 거기에다 앙증맞은 미니 컴포넌트를 하나 집어넣고 나서야 아내가 행복해 하게 되었다. 물론 컴포넌트 자체가 기쁨을 준 것은 아니다. 오랜 동안 그저 쟁여두다시피 했던 음악 시디들을 틀어 놓고 식탁에서 함께 식사도 하고 술도 한 잔 할 수 있게 되면서, 이사하기 정말 잘했다는 생각을 아내가 갖게 된 것이다.
아내가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면서 그 기쁨을 나눠 갖게 되기도 했지만, 딸애와 나도 그 작은 컴포넌트에 시디를 넣어 돌리면서 잊어버렸던 기쁨 하나를 새로 되찾게 되었다. 4년 전에 일 년간 미국 생활을 하면서 온 가족이 함께 즐겨 들었던 시디를 틀고는 각각의 곡에 묻어 있는 회상을 나누느라 이야기꽃을 활짝 피우게 된 것이다. 한동안 아내는 부엌에 있을 때마다 비틀즈를 틀어 놓았고, 나는 나대로 예전에 샀던 베토벤의 교향곡들을 귀에 담았다. 대부분의 경우는 로스트로포비치의 첼로 곡이나 조지 윈스턴 류의 경음악 혹은 잔잔한 영화음악 등을 생활의 배경음악으로 깔아 놓는다.
음악 감상이 취미인 사람들이야 여기까지 들으면 아무 특별할 것이 없는 일이라 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다. 이사하기를 잘했다며 우리 모두가 즐거워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각자가 음악을 더 자주 듣게 되어서가 전혀 아니기 때문이다. 한가한 시간이면 이어폰을 귀에 넣고 지내는 딸애는 물론이고, 아내도 나도 저마다 음악 듣는 일이 적지는 않다. 나는 운전을 할 때마다 항상 KBS 제1FM에 주파수를 고정시키고, 연구실에서도 가끔은 좋아하는 음악을 챙겨 듣는다. 나보다 운전하는 시간이 많은 아내도 비슷하다.
사정이 이러하니, 우리가 음악으로 해서 기뻐할 수 있게 된 데는 음악 자체가 아니라 다른 요인이 더 크게 작용했다고 하겠다. 그것은 바로, ‘가족이 함께’ 음악을 듣게 된 사실이다. 스마트폰에 꽂은 이어폰으로 혼자 듣는 것이 아닌 음악 듣기, 컴퓨터에서 음원을 열어 혼자 듣는 것이 아닌 음악 듣기를, 저 작은 컴포넌트를 통해 새삼 경험하면서 우리 가족 모두 잊어버렸던 즐거움 하나를 찾은 것이다. 오로지 음악을 듣기 위해, 그것도 가족과 함께 음악을 듣기 위해, 컴포넌트를 켜고 시디를 찾아 넣는 데서부터 우리들의 기쁨과 즐거움이 생겨났다.
물론 우리 집에도 음악을 들을 수 있는 기기가 없지는 않았다. 플레이어와 컨트롤 리시버가 분리되어 있고 스피커의 출력도 웬만큼 되는 오디오 기기를 거실 한가운데에 갖춰 놓고 지내 왔다. 15년 전 포항에 내려올 때 새로 마련한 것인데, 처음 얼마간만 자주 들었을 뿐, 시나브로 안 틀게 되었을 뿐이다.
지금 생각해 보니 그리 된 가장 큰 이유는, 사실상 거실에서 음악을 듣는 것이 적절치 않기 때문이다. 아이가 제 방에서 공부를 한다든가, 아내가 주방에서 일을 하거나 침실에서 책 혹은 텔레비전을 볼 때, 혼자 거실에 앉아 음악을 들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주방에서 가족들이 함께 식사를 하며 듣겠다고 거실의 음악을 크게 트는 것도 요즘처럼 층간소음이 문제되는 때에는 당치 않은 일이다. 요컨대 요즘 시대에는 거실 자체가 음악 감상의 좋은 장소가 못 되었던 셈이다. 이를 다소 거창하게 말하자면, 컴퓨터와 인터넷, 스마트폰 때문에 거실에 가족들이 함께 모이는 일 자체가 드물어지게 된 문명사적인 변화의 한 결과라 하겠다.
이러한 상황에서 가족 구성원이 함께 보내는 시간이 가장 많은 곳은 식탁이 놓인 주방이 되었다. 바로 그러한 주방에다가 작은 컴포넌트를 들여 놓음으로써 ‘가족 구성원이 함께 하는 음악 감상’이 가능해진 것이고, 이를 통해 함께 음악을 듣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게 된 것이다. 요컨대 집을 멋지고 깔끔하게 새로 꾸몄어도 가족 구성원이 함께 즐기지 못했던 상황에서, 비용으로 쳐도 스마트폰의 1/4 정도밖에 안 되는 작은 컴포넌트 하나로 ‘동락(同樂)’의 즐거움을 누리게 됨으로써, 아내도 나도 그리고 딸애까지도 새삼스러운 행복을 느끼게 된 것이다. 저마다 떨어져서 듣는 음악이 아니라 함께 들으며 행복을 나누는 음악을 돌려 준 작은 컴포넌트에게 한없이 큰 고마움을 느낀다.
이 컴포넌트가 돌려준 것에는 가족의 행복만이 아니라 음악 자체도 포함된다. 본시 음악이란 사람들이 함께 즐기는 것이지 혼자 맛보는 것은 아니었다. 동양의 전통에서 음악이란 ‘아름다운 곡조’를 나타내는 음(音)과 ‘도덕적 의미가 전제된 위에서 연주와 춤이 포함되어 사람들을 화합시키는 기능을 하는’ 악(樂)이 더해진 것으로서 자연스럽게 예(禮)와 합쳐져 ‘예악(禮樂)’을 이루기까지 했다(조남권·김종수 공역, 『동양의 음악사상 악기(樂記)』, 민속원, 2000). 서양의 경우 또한 근원이 다르지 않고, 오늘날 우리가 즐겨 듣는 서양음악 또한 궁정과 극장, 살롱, 공공 음악회 등을 통해 공적인 영역에서 발전한 것이다(이경희,『음악청중의 사회사』, 한양대출판부, 2006).
이러한 점을 생각하면, PC의 등장에 따라 전동타자기가, 스마트폰의 보급에 따라 네비게이션은 사라졌어도 콤포넌트만큼은 명맥을 유지했으면 싶다. 몸은 함께 있되 각자 따로 노래를 부르는 노래방에서의 노래 부르기가 문화생활이기보다는 단순한 소비 활동에 가까운 것처럼, 스마트폰이나 PC를 통해 혼자 듣는 음악 또한 사회문화 활동으로서의 음악 감상과 거리가 먼 것임은 부정하기 어려운 까닭이다. 공공의 장에서 행해지는 음악이 여럿 있기는 해도, 가족이나 친구, 연인과 더불어 귀를 답답하게 하지 않으면서 제대로 된 사운드로 음악을 즐기는 문화가 좀 더 이어졌으면 좋겠다. 해서 마음속으로나마 뇌어 본다. 컴포넌트여 영원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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