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준 포스텍 인문사회학부 교수
아들애가 군대에 가 있다. 훈련소 생활을 탈 없이 마치고 이제 자대 배치를 받아 부대에 들어간 지 열흘가량 된다. 입대한 지 두 달이 넘었건만 아직도 내 마음은 편치 않다. 자식이 작대기 하나 달린 계급장을 달고 낯선 부대에 막 배속된 상황에 처한 부모라면 모두 가질 법한 걱정이 없지 않은 까닭이다. 내가 지금껏 간절히 바라는 바는, 세상을 시끄럽게 했던 그런 못된 유형의 선임병을 만나지 않는 것이다. 천만다행으로 그렇지는 않은 듯싶지만 그래도 마음을 턱 놓을 수는 없는 것이 부모 된 자의 심정이다. 물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거의 없다. 간혹 기회가 될 때마다, 맡은 일을 열심히 적극적으로 하라고 말해 주는 것이 전부다. 근 30년 전에 내가 겪었던 군대를 생각해 보면서 아이도 잘 참아내겠지 믿는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자식의 성실성과 인내심을 기대해야만 하는 경우라니, 생각해 보면 실로 딱한 처지라 하겠다. 그렇다고 어찌하겠는가, 아이가 가 있는 곳이 ‘상명하복’을 뼈대로 하는 군대임에랴!
나의 걱정이 자식을 신참으로 부대에 둔 부모의 노파심에 그치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그러한 노파심도 없어질 수 있는 사회 상황을 그려 보고자 한다.
따지고 보면 각종 사회 조직들 내에도 엄연한 위계가 있다는 점에서 군대라는 조직만 특별한 것은 아니다. 제가 싫다고 아무 때든 그만둘 수는 없다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기는 해도, 지내는 동안의 어려움이 생기는 메커니즘은 동일하다 하겠다.
어떠한 조직 속에서 누군가와 더불어 지내는 것이 불편해지는 이유는 다양하다. 조직의 목적과 성격을 잘 파악하지 못해서 엉뚱한 언행을 일삼거나, 해야 할 일을 아직 잘하지 못하는 상태에 있거나, 상황에 대한 파악과 판단에 있어 큰 실수를 하거나, 팀원 간의 조화나 협력 업무를 등한시하거나 하는 경우처럼 자신의 잘못이 원인이 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러한 경우들에서는 교정과 교육, 협력을 통해 어려움을 극복해 나아가게 마련이다. 본인의 노력 외에도, 조직 자체가 자신의 발전을 위해 개인의 그러한 노력을 아낌없이 도와주는 까닭이다.
이와는 달리 조직 차원에서의 배려나 개선 노력이 미치지 않는 자리에서 개개인이 겪어 내야만 하는 불편함과 어려움 또한 존재한다. 조직과 개인의 불화라 할 때 실로 문제가 되는 경우는 바로 이러할 때이다. 이 중에서도 심리적인 차원에서 가장 문제되는 것은, 상대방이 나의 처지를 돌보아 주지 않는 데서 온다. 미미하게는 배려나 보살핌의 부재이고 심각하게는 공적에 대한 합당한 인정조차 없애는 따돌림 혹은 배제가 그 구체적인 양상이다. 이러한 문제는, 상위 직책에 있는 사람이 아랫사람인 나의 상황과 입장을 고려해 주지 않을 때 발생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사회적 존재로서 사람이 갖는 기본적인 욕구는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는 것이다. 생명의 유지만을 바라는 동물과는 달리 인간은 ‘타인의 욕구를 욕구’하는 특징을 보인다. 타인이 배려하고자 하는 존재, 사랑하고자 하는 존재, 위하고자 하는 존재가 되고자 한다는 말이다. 타인의 배려나 사랑, 위함이라는 욕구를 욕구함으로써 자신의 존재 가치를 인정받고자 하는 것이야말로 인간이 인간으로서 가지는 고유한 특성이다. 이렇게 ‘다른 욕구를 지향하고 있는 욕구’인 인간적 욕구를 가지는 존재로서 인간은, 이를 위해서라면 동물적인 욕구를 버릴 수도 있게까지 된다. 자기 존재의 인정을 위해 생명을 걸 수도 있는 것이다. 독일 고전주의 철학의 대가인 헤겔이 ‘인정 투쟁’이라 명명한 이러한 사태는 모든 인간에게 적용되는 것으로서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으로 설명된다(알렉상드르 꼬제브, <역사와 현실 변증법 -헤겔 철학 입문>, 한벗, 1981).
타인의 욕구를 바라는 인정 투쟁에서는 상사도 부하직원도 예외가 없는 것이지만, 앞에서도 말했듯이, 실제에 있어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기 위해 목숨까지 거는 도전을 심각하게 고민하는 일은 조직의 위계 내에서 아래에 있는 사람들의 몫이기 십상이다. 이러한 문제를 완화하기 위해 개인의 자의가 아니라 규약과 시스템이 작동하는 조직을 만들어 왔지만, 그러한 규약의 적용 자체가 윗사람(!)들에 의해 이현령비현령(耳懸鈴鼻懸鈴) 식으로 들쭉날쭉한 양상을 띤다면 사태는 오히려 심각해진다. 인간에 대한 기본적인 존중 의식이 사라지고 규약과 시스템을 투명하게 적용하고 철저히 지키는 공인 정신이 실종됨으로써 국가 사회 곳곳에서 ‘갑질’이 만연하는 오늘 우리의 상황은,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동물의 왕국’에 가까워졌다 하겠다.
동물의 왕국에서 동물로 격하될 위험에 처한 인간은 자신의 목숨까지 걸면서 인정 투쟁에 나설 수밖에 없게 된다. 생명을 잃을 위험을 알면서, 생명을 보지하는 데 필수적인 생활의 안정이 박탈될 위험을 십분 의식하면서, 자신들의 처지에 대한 국가 사회 공동체의 적절한 배려를 요구하기 위해 길에 나서고 피켓을 들고 시위를 하게도 되는 것이다. 매우 안타깝게도 2015년 현재 우리의 상황이 여기서 멀지 않다.
상황이 이렇게까지 된 주요 요인은 무엇인가. 학계와 정계, 정부의 요직을 두루 거친 조순 선생이 10여 년 전에 답을 내린 바 있다. 경제제일주의가 나라를 영도하여 경제를 발전시키기는 했으되 경제 발전이라는 미명하에 자유경제의 기본적인 질서를 도외시하고 국가 사회의 기본 제도를 갖추는 일 또한 훼손해 온 까닭이다. 그 과정에서 지성인의 활동이 국가권력에 의해 위축됨으로써, 국가를 제대로 이끌어 갈 올바른 지력이 부재하게 된 것이 역사적인 근본 원인이다(조순,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사상과 한국>, 조순 외, <존 스튜어트 밀 연구>, 민음사, 1992).
여기까지 와서 보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가 자명해진다. 자유민주주의 국가로서 갖춰야 마땅한 제도들이 제대로 작동하는 나라, 갑의 자리에 있는 자가 을의 처지를 공감할 줄 아는 건전한 시민사회, 어떤 형태로든 ‘갑질’이 행해질 때 정의에 입각한 시선이 그것을 제지할 수 있는 공동체가 그것이다. 이를 위해 우리 각자가 깨어 있어야 함은 물론이요, 역사의 잘못을 호도하고 과오를 다시 범하려는 일체의 반동에 맞서 우리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고자 노력해야 한다. 정의가 살아 있고 상식이 훼손되지 않는 정상적인 사회에 대한 꿈을 포기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온 사회가 군대인 것은 아닌 이상, 이러한 꿈마저 비정상인 양 간주되어서는 정말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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