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에서 가르쳐야 할 것
학교에서 가르쳐야 할 것
  • 정태영 기자
  • 승인 2015.12.02
  • 호수 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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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준 포스텍 인문사회학부 교수
학교에서 가르치는 자가 무엇을 가르쳐야 하는가는, 이제는 별로 제기되지 않는 문제인 듯하다. 사교육이 갈수록 극성을 부리는 현실을 생각하면 요즈음이야말로 절실하게 물어져야 하는 질문임에도 불구하고, 고등교육기관의 교단에 서는 누구도 그러한 질문을 공론화하지는 않는 것 같다. 한 세대 전까지만 해도 교과교육을 수행하는 것만으로도 가르치는 자의 소임을 다했다고 말할 만한 상황이었다. 교과교육을 학교 밖에서 훌륭하게 대행해 주는 사교육이 일반화되지는 않았으므로 수학이나 영어를 잘 가르치기만 해도 선생으로서의 소임을 했다고 생각할 수 있었던 것이다. 대학도 사정이 다르지 않았다.

냉정하게 따지고 보면, 중고등학교나 대학에서 가르치는 교과 내용은 학교의 선생만이 가르칠 수 있는 것이 전혀 아니다. 각종 학원에서 더 잘 가르치기도 하는 현실이 이를 입증해 준다. 요즈음은 심지어 대학 교육의 내용조차 그러하다. 학교 선생의 역할을 다시 생각해 보는 것이 그러한 현상에 비추어서라면 구차스럽기도 하지만, 계기가 무엇이든 필요한 질문은 물어져야 한다. 교과에 있는 지식을 가르치는 것 외에 학교의 선생이 가르쳐야 하는 것은 무엇인가. 질문을 바꾸어 보면 생각을 진전시키기가 한결 쉬워진다. 학원에서 더 잘 가르치기도 하는 교과서 교육 외에, 학생이 학교를 통해 배워야 하는 것은 무엇인가.

내가 생각하는 답은 지혜이다. 학교교육이 학생들에게 키워 주어야 하는 핵심은 지식이 아니라 지혜가 되어야 한다.

지혜를 가르쳐야 한다는 말과 관련하여 생길 수 있는 오해를 예방해 두자. 지혜 교육은 시대착오적인 ‘인성교육진흥법’으로 논란이 되기도 했던 인성 교육과는 무관한 것이다. 지혜를 키우다 보면 인성이 좋아질 수도 있겠지만, 인성이 좋다고 지혜로우리라는 보장은 전혀 없다. 둘은 다른 덕목이다. 지혜를 교육하기 위해 선생에게 일차적으로 요청되는 것이 윤리적 소양 등속은 아니라는 점 또한 명확히 해 둔다. 지혜로운 스승의 이상적인 모습이 동서양 고대의 성현인 것은 사실이지만, 성현만이 지혜를 갖는 것도 아니요 윤리적 고결함과 같은 성현의 다른 자질이 지혜의 구사와 불가분리적인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지혜 교육을 생각할 때의 지혜란 ‘사물의 이치를 빨리 깨닫고 사물을 정확하게 처리하는 정신적 능력’이라는 말뜻 그대로의 지혜일 뿐이다. 따라서 교과서의 내용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러한 지식, 정보가 가리키는 실제의 문제를 제대로 파악하고 처리할 수 있는 능력을 함양하는 것이 관건이 된다. 더 넓게 말하면, 책의 내용을 숙지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내용이 원래 의미하는 바를 깨닫게 하는 것, 지식의 양을 증대시키는 것 자체가 아니라 지식이 요청되었던 실제의 문제를 처리하는 능력을 갖추게 하는 것이 지혜 교육의 목표가 된다.

지혜를 교육하는 데 있어 중요하면서도 다루기 곤란한 것이 책이다. 사태를 단순화하여 근본적으로 말하자면 지혜를 가르치는 데 책이 꼭 필요한 것은 아니라 할 수 있다. 공자나 맹자, 예수는 물론이요 소크라테스도 책을 가지고 제자를 가르치지 않았으며 어떠한 책도 쓰지 않았다. 주지하듯이, 그들의 언행을 제자들이 기록하여 책으로 남겼을 뿐이다. 소크라테스 같은 경우는 책을 이루는 글 자체를 부정적으로 보기까지 했다. 글이란 이미 앎을 가진 사람이 알고 있는 것을 상기시키는 기능을 할 뿐이어서, 글로부터 명석함과 확실함이 생겨나리라고 믿는 것은 순진한 생각이라는 것이다(플라톤, <파이드로스>, 문예출판사, 2008). 다소 속되게 이해하자면, 서로 상충하는 책들의 내용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어떠한 판단도 행동도 할 수 없다는 점을 생각하기만 해도 부정할 수 없는 말이다.

물론 오늘날의 지혜 교육이 저 옛날의 도제식 교육 방식으로 이루어질 수는 없다는 사정을 고려하면, 책이 없이 교육을 진행하는 것은 상상할 수 없다. 우리 시대의 선생들 대부분이 저 성현의 지혜에 턱없이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은 차치하고서라도 말이다. 따라서 지혜 교육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책을 다루는 법을 교육자 스스로 연구해야 하고 그것을 학생들에게 모범으로 보여야 한다. 책을 올바로 제대로 다루는 법을 학생들이 보고 배울 수 있게 하는 방법을 선생들이 갖춰야 한다는 말이다. 사실은 이것이야말로 현재 우리가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지혜 교육의 핵심이다.

간명히 말해 보자면, 독서의 올바른 방법을 시연하는 것이야말로 학생들의 지혜를 키우는 유일하고도 정당한 교육 방법이라 하겠다. 쓰여 있는 것을 그대로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대신에 그러한 내용이 산출된 맥락을 이론과 실제의 층위에서 알게 하는 것, 그럼으로써 책의 논리를 만드는 정신이 우리에게 갖는 의미를 생각해 보게 하는 것, 요컨대 학생들이 저자와의 비판적인 대화를 시도할 수 있게 이끌면서 그러한 대화가 갖는 의미를 생각하게 하는 것이 지혜를 기를 수 있도록 지도하는 길이다.

학생들 스스로 사고하는 능력을 기르는 데 일차적인 목표를 두는 이러한 지혜 교육에서 성과를 보자면 어떠한 책을 읽힐 것인가. 목표를 잊지 않는다면 답은 명확하다. 어떠한 문제에 관한 논의의 지형에 의미 있는 변형을 가하는 ‘상이한 입장의 책들’을 함께 읽게 해야 한다. 하나의 판단을 제시해 주는 대신에 복수의 판단에 맞서게 함으로써 학생을 고민하게 만들어야 한다. 다른 측면에서는, 자신이 진리라고 주장하는 책이 아니라 진리에 대한 탐구를 보여 주는 책을 대하면서 진리를 찾아 나서는 모험을 경험하게 해 주어야 한다.

대부분의 경우 독서 교육이 요식 행위가 되어 버린 중등교육에서는 교과 교육 자체가 독서 교육이 될 수 있도록 해야 하고, 대학교육에서는 현재보다 더 많은 책들, 더 다양한 책들을 읽게 해야 한다. 교과서나 교재든 참고도서든 학생들이 다양한 많은 책들에 노출되어 각각이 담고 있는 주장과 논리를 상대해 볼 수 있을 때, 바로 그러할 때만이 실제의 문제에 대처할 수 있는 지혜의 신장을 기대해 볼 수 있다. 주입식 교육을 탈피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믿는다면, ‘주입할 수 없을 만큼의 책들’을 읽게 하는 방법으로라도 이러한 지혜 교육의 유효성을 진지하게 고려해 보았으면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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