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준 포스텍 인문사회학부 교수
예술의 보편성에 대한 믿음은 실제 이상으로 널리 퍼져 있다. 밤하늘의 별이 원래 빛을 발하는 것처럼 훌륭한 예술작품 또한 스스로 광채를 내는 것이라는 생각이 우리 모두의 마음에 드리워져 있다. 아름다운 작품은 누구에게나 아름답다는 상식적인 말이 그 뒤를 받쳐 준다. 참된 예술작품이란 시간과 공간의 한계를 넘는다고 칭송된다. 동서고금의 고전적인 작품들은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는 말 그대로 시간의 무게를 이기는 것이며, 전 세계 각 나라의 명작이 우리에게 다가오듯이 예술작품은 지역적인 한계도 알지 못한다고 여겨진다. 예술의 한 갈래인 문학 또한 마찬가지다. 고전으로 여겨지는 문학작품들은 동서양 여러 나라의 작품들을 망라하며, 시기적으로 보아도 인류 문명사 전체에 걸치는 양상을 보인다. 훌륭한 문학작품은 그 자체로 훌륭하기 때문에 훌륭한 것이지, 시대 상황이나 지역적인 특성 때문에 그렇게 간주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작품이 훌륭하기만 하다면, 언어의 문제에 구애받지 않는 한, 전 세계의 모든 사람들에게 사랑받을 수 있다고 여겨지는 것이다. 예술 일반과 더불어 문학 또한 이렇게 보편적인 것으로 상정된다.
하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다. 21세기 현재 전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문학을 보면 보편성 주장이 그럴 듯하게 생각될 수 있지만, 각 나라의 문학작품 고금의 문학작품들에 주목해 보면 그렇지 않음이 확인된다(다른 예술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각 시대 각 지역 특유의 문화를 구성하는 일 요소로서 기능하는 다양한 문학작품들뿐이라 할 수 있다. 서양 중세의 기사도문학과 우리나라 조선 시대의 영웅소설은 서로 다르다. 중국 청조의 무협소설이나 일본 중세의 군키모노가타리(軍記物語) 또한 같지 않다.
각 지역마다 각 시대마다 특유의 문학작품들이 있어 왔다는 역사적인 사실을, 이른바 고전이라고 불리는 혹은 세계문학으로 꼽히는 소수의 작품들이 가리고 있는 것이다. 이들 작품이 예술적으로 미학적으로 뛰어난 것은 물론이지만 이러한 사실이 이들 작품들만 뛰어나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미적인 뛰어남 외의 다른 요소가 개입하여 고전이라는 위상을 이들 작품에 부여하면서 이들을 중심으로 세계문학이라는 가상을 만들어 온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두 가지 맥락으로 확인된다. 첫째는 ‘고전(classic)’ 혹은 ‘세계문학’이라는 명칭의 유래이다.
‘고전’이라는 말은 원래 특정 예술을 가리키는 고유명사였다.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이 대표하는 18세기 후반 빈의 음악세계를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가(홍정수 외, <두길 서양음악사>, 나남, 2006), 이후 대상을 넓게 하여 ‘훌륭한 예술’ 일반을 가리키는 보통명사로 변화된 것이다. ‘세계문학’의 경우는 1820년대에 괴테에 의해 주창된 것인데 말의 뜻과 달리 서유럽 문학에 사실상 한정된 것이었다(John Pizer, The Idea of World Literature, LSU, 2006). 요컨대 두 용어 모두 그것이 현재 지니는 의미를 원래부터 갖고 있던 것은 아니었다.
고전이나 세계문학이 가상의 것이라는 점은 이들 개념이 가리키는 대상이 변화해 왔다는 사실에서도 확인된다. 과거와 현재의 이들 목록을 살펴보면 이러한 변화 양상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우리 시대에 새롭게 발표된 작품들 중에서 훌륭한 것이 새로 고전의 지위를 차지하게 되어 생기는 변화를 논외로 해도, 적지 않은 작품들이 시대에 따라 고전의 목록에서 지워지거나 다시 등재되거나 하는 양상을 보이는 것이다. 예를 들어 1979년판 정음사의 세계문학전집 목록을 보면 이제는 별로 주목받지 않는 <투사 삼손>이니 <여인의 전당>, <여자의 일생>, <협잡꾼 또마> 등을 찾아볼 수 있다. 한때 고전으로 여겨진 작품들이, 밤하늘의 별과는 달리, 불과 몇 십 년 만에 잊히기도 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대로 고전이나 세계문학이 실상은 하나의 가상이어서 그 내용이 역사적으로 변화한다는 사실이 알려 주는 것은 무엇인가. 문학작품이 시공간적으로 제약된다는 것, 작품의 훌륭함과 의의를 파악하는 데 있어서 역사와 지리적인 경계가 의미 있게 작용한다는 것, 이상 두 가지다. 무릇 모든 문학작품들은 사실상 역사적인 존재이다. 시대의 변화에 따라 읽히고 평가되는 데 있어서 변화하기 마련이라는 말이다.
또한 모든 문학작품들은 넓게는 국경이나 문화권 좁게는 문학 장(field)과 관련된 사회 계층의 코드에 따라 달리 만들어지고 받아들여지며 다른 위상을 차지하게 된다는 뜻이다(삐에르 부르디외, <구별짓기 -문화와 취향의 사회학>, 새물결).
문학과 예술의 기능에 주목하여 보면 앞서 말한 가상이 더욱 뚜렷해진다. 시공간적인 제약에 따라 그 형태가 정해지는 그러한 수동적인 면이 아니라 특정한 사회의 특정한 상태 속에서 바로 그 상태에 저항하는 주요 활동의 하나가 예술이요 문학의 본질에 가까운 까닭이다. 근대 사회에서 문학 특히 소설이 차지해 온 위상이 그러하다. 근원에 있어서 볼 때 문학은, 예술의 일원으로서 감성의 분할 체제에 따라 역사적으로 변화하는 한편(자크 랑시에르, <감성의 분할>, 도서출판b), 그에 그치지 않고, 치안 질서에 따른 정체성 부여에서 제외된 것들을 발명해 내어 질서를 교란하는 방식으로 ‘공동체 안에서 요소들의 무게와 가시성에 변화를 주는’ 정치의 기능을 수행해 왔다(자크 랑시에르,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 도서출판 길). 기성의 질서가 없는 듯이 해 온 것들에 말을 부여해 주는 불온한(!) 역할이야말로 진정한 문학의 역사적, 정치적 기능인 것이다.
문학예술의 보편성에 대한 믿음은 가상의 것이며, 역사적으로 볼 때 그 자양분은 서구 제국주의의 세계 제패에 수반되었던 서양문화의 패권이다. 신자유주의가 횡행하는 오늘날에는 국경을 아랑곳하지 않는 자본 또한 가세하여, 보편적인(?) 문학예술과 더불어, 자본을 증식시키는 데 오롯이 복무하는 상업주의적인 문학과 예술을 대량으로 무차별적으로 살포하고 있다. 이렇게, 고전적인 세계문학과 전 세계를 대상으로 하는 대중문학이 할리우드 영화와 똑같은 방식으로 우리의 문화 향유를 글로벌화 하는 와중에, 앞서 설명한바 문학예술의 역사성과 정치적인 기능이 우리의 시야에서 가려지고 있다. 하루키 풍의 모방, 이식과 더불어 무국적화 양상을 강화해 온 1990년대 이래 우리 문학의 부흥이 그러한 가려짐의 원인이자 결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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