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의 위상, 인문정신의 힘
인문학의 위상, 인문정신의 힘
  • 정태영 기자
  • 승인 2015.12.23
  • 호수 327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박상준 포스텍 인문사회학부 교수
1. 인문학의 자리

경제적 신자유주의가 지배하는 현대 사회에서 인문학은 배경음악과도 같은 위상으로 격하되었다. 자체로 감상되지는 못하고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로 장소의 품위(?)를 높여 주는 장식으로 전락한 그러한 음악의 자리에 놓여 있다. 자본의 논리에 비춰 보면 사정이 더 열악하다. 자신의 증식을 목표로 하는 자본이 보기에 인간을 앞세우는 인문학의 주장이란 신경에 거슬리는 소음에 불과하다.

자본과 인문학의 실제적인 관계는 인문학의 상품화에서 뚜렷이 확인된다. 어떤 사회적 활동도 상품 형식을 떠나서는 존재하기 어려운 상황 속에서 인문학 또한 자본의 증식 수단의 하나로 가공되고 소비된다. 서재나 강의실을 벗어나온 거리의 인문학이 기획자들과 수요자들의 입맛에 의해 요리되는 현실이 이를 증명한다.

우리 시대의 또 하나의 표지인 민주주의와 관련해서도 유사한 상황이 조성되어 있다. 공화정으로 시작되는 현대 민주주의 사회와 계몽주의에서 연원하는 현대의 인문학은 공통의 출발점을 갖는다. 양자가 하나가 되어 유럽에서 새로운 세계를 이루어 내었고 그 새로운 정치체제가 이제 전 세계를 장악하고 있다.

하지만 현재의 실상을 들여다보면 이 둘 역시 불균등한 역학 관계에 놓여 있음이 확인된다. 북한도 미국도 똑같이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상황에서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인문학이란, 통치할 자격을 갖지 않은 자들이 권력을 행사하는 이 민주주의 체제(자크 랑시에르,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 도서출판 길, 2013)를 유지하게 하는 시녀의 자리로 내려앉아 버렸다. 민주주의 체제라는 것들의 비민주주의적인 실제를 보기 어렵게 하는 것이 대중적인 인문학의 역할이 되어 버린 것이다.


2. 인문학자의 성격

이러한 상황에서(도 여전히!) 인문학을 탐구하고 퍼뜨리고자 함으로써 인문학자는 기묘한 존재가 되어 버렸다.

인문학자란 요령부득의 존재이다. 그들은 돈 버는 일이 중요하지 않다면서도 강의를 하거나 책을 써서 돈을 번다. 인간의 삶에서 경제가 차지하는 비중이 지금처럼 커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 것으로 사회적 부의 일부를 수령하는 것이다. 그들의 행태는 더욱 이해하기 어렵다. 그들 자신만이 옳다는 듯 다른 주장들을 비판하는 데 온 힘을 기울이며 배제의 논리 위에서 진리 주장을 행한다. 그 결과로 생기는 인문학 논의의 난해함과 착종 현상이 인문학의 사회 내 위상을 더욱 위태롭게 하는데도 말이다.

인문학자의 이러한 면모는 그들 존재의 경계적인 성격 탓이라 할 수 있다. 그들은 사회 내에 있되 사회 바깥으로 시선을 돌린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사회가 스스로를 가장하는 면모를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 현재 사회의 과거나 현 사회 너머의 어떤 지점을 탐구하며 그로부터 사회의 모습을 통찰하고자 한다. 이 사회에 발을 디디되 이 사회의 논리 바깥에서 작업을 수행하는 이러한 특성 때문에, 인문학자는 삐딱한 존재이며 사회의 은공을 모르는 배덕자가 된다. 인문학자는 자신을 키워 주는 사회의 정당성을 끊임없이 회의하는 배은망덕한 모습을 자신의 덕으로 삼는다.

인문학자란 배반의 존재이다. 자신이 발을 디디고 있는 사회의 이면을 탐구하면서 사회가 내세우는 진리 주장에 흠집을 내는 것이 그들의 일이다. 이렇게 인문학자는, 근대사회의 수립에 기여했던 초기 계몽주의 이데올로그들의 후예면서도 제 아비를 배반하고 스스로를 사회 맞은편에 세웠던 ‘비판적 지식인’의 연장선상에 서 있다. 자신의 전문분야에 갇히는 ‘지식 기사(engineer)’와 달리 사회 전반의 ‘남의 일’에 관심을 갖고 적극적으로 참견하는 ‘지식인’의 직계 후손인 것이다(장 폴 사르트르, <지식인을 위한 변명>, 한마당, 2008).

인문학자들이 비판적 지식인으로 남을 수 있게 된 데는 이 사회의 공로와 책임 모두가 크다.

사회의 책임을 말할 수 있는 소지는 두 가지다. 우리가 살고 있는 근대 국가 거의 모두가 정치 체제와 상관없이 민주주의를 지향한다는 점이 하나요, 시민사회의 영역에서는 자유주의를 신봉한다는 사실이 다른 하나다. 이렇게 민주주의와 자유주의를 표방하되 실상은 민주적이지도 자유스럽지도 못한 방식으로 자신을 유지하는 까닭에, 순진하고 눈 밝은 인문학자들이 분개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이것이 사회의 책임이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사회의 공로를 말할 수 있다. 바로 그러한 인문학자들을 사회가 먹여 살리고 키우는 까닭이다. 저 옛날 선원들이 배의 위험 상태를 손쉽게 확인하기 위한 수단으로 배 밑바닥에 쥐를 키웠다 하듯이, 우리 시대의 사회는 인문학자들을 연명시킴으로써 위기 상황에 대한 신호 체계 하나를 작동시키고 있다. 물론 대부분의 사회는 그 신호를 무시한다. 사회가 인문학자들의 목소리를 배제하지 않는 것은, 바로 그 정도만큼 자신의 실제를 가리는 알리바이를 획득할 수 있기 때문일 뿐이다.


3. 인문정신의 힘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문학은 자기 정체성을 부정당하는 위험에 놓여 있고 그 결과로 인문학자들은 자신을 지키기 위해 더욱더 배덕자의 자리를 찾고 있다. 이것이 불행한 상황일까. 그렇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인문학의 사고 내에서의 순진한 판단일 뿐이다. 플라톤의 철인정치도 실러의 미적 교육도 실제 현실에서는 실현된 적이 없는 인문학의 사고실험일 뿐이었기 때문이다. 인문학의 기획은 언제나 역사에서 배신당해 왔다. 행불행을 따질 필요가 없이, 이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강조할 점은, 바로 그러한 현실적인 패배 속에서 인문학이 자신을 키워왔다는 사실이다. 인문학에 있어, 자신을 부정하고 배반하는 현실이야말로 자신을 한층 벼리게 해 주는 원동력이어 왔다.

사정이 이러하기에 인문학(자)의 운명이란 현실에서 실현되지 않을 말을 끊임없이 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실현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확실히 알면서도 계속 말하는 것, 근대소설의 아이러니(Ironie)라고 일컬어지기도 했던 이러한 태도(루카치, <소설의 이론>, 문예출판사, 2007)가 인문학의 핵심인 인문정신의 정체이다.

인문학 상호간의 비판을 원동력으로 하여 사회에 대한 반성적 거울의 역할을 끊임없이 유지함으로써, 인문정신은, 부단히 변화하는 사회보다 한순간 먼저 한걸음 더 나아가기를 계속한다. 이것이 인문학을 발전시키는 동력이자, 우리 삶의 지속과 향상에 기여하는 인문정신의 힘이다.

  • 서울특별시 구로구 공원로 70 (대한산업안전협회 회관) 대한산업안전협회 빌딩
  • 대표전화 : 070-4922-2940
  • 전자팩스 : 0507-351-7052
  • 명칭 : 안전저널
  • 제호 : 안전저널
  • 등록번호 : 서울다08217(주간)
  • 등록일 : 2009-03-10
  • 발행일 : 2009-05-06
  • 발행인 : 박종선
  • 편집인 : 박종선
  • 청소년보호책임자 : 김보현
  • 안전저널의 모든 콘텐츠(영상, 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본지는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 윤리강령 및 실천요강을 준수합니다.
  • Copyright © 2025 안전저널. All rights reserved. mail to bhkim@safety.or.kr
ISSN 2636-0497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