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수 부산외국어대학교 교수

잘 산다는 것은 안전하고 따뜻한 인간미가 오가는 사회에서 사는 것
해마다 연말만 되면 교수들이 한 해를 사자성어로 표현하는 일을 하곤 하는데, 작년 연말에는 혼용무도(昏庸無道)를 선택해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노골적으로 말한 건 아니지만 대통령의 행태를 질타한 데 대해서 사람들은 놀랐고, 이 사회가 나만이 그렇게 느낀 게 아니고 교수들이 저렇게 말을 할 정도로 정말 그런가 보구나 라고 생각을 하면서 고개를 떨구었다. 그런데 교수들은 왜 ‘昏庸無道’라는 사자성어를 택했을까? 이 사회가 무엇 때문에 인간이 취해야 할 도(道)가 없는 사회에 내몰리게 됐을까? 이런 것을 생각해보니, 순간 씁쓸해진다.
도가 없어져버린 것은 소위 무능한 군주 즉 무능한 대통령 때문이라고 하는 시각인데, 과연 그러할까? 그런 생각에 동의하기 어렵다. 대통령과 정치계를 남 욕 하듯이 싸잡아 비판하면서 자신들은 전지자적 시점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듯한 그 교수들의 선택에 동의할 수 없다.
‘헬조선’이라는 듣기에도 끔찍한 언어를 만든 것은 대통령도 아니고 정치하는 사람도 아닌 오로지 돈만 바라보고, 남의 것 빼앗아서 내 배 채우는데 혈안이 되는 세상을 만드는데 선비로서 딸깍발이로서 제 역할을 하지 못한 교수들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멀리 시리아 땅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든 말든 내 알 바 아니라고, 미국의 총기 사고보다 더 많은 수의 사람들이 눈앞에서 자살을 하는 일을 보면서 애써 눈을 감는, 동료 대학교수가 돈에 눈이 먼 정부와 대학 당국을 꾸짖으며 몸을 던져 자살을 하든 말든 오로지 내 성과, 내 출세, 내 이익만 바라보며 입을 닫아버린 게 이 사회를 이 꼴로 만들었다고 반성을 먼저 해야 하는데, 그들은 (아니 우리들은) 그렇지 못했다. 시대의 사표(師表)여야 할 사람들이 정치 권력, 경제 권력, 언론 권력의 마름이 된 것에 대해 처절한 반성을 해야 하는데 그러하지를 못했다. 그래서 昏庸無道의 세상이 된 것이다.
그 권력이 만든 거대한 틀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날라치면, ‘알바’생은 ‘성실하지 못하는 놈’이 되어버리고, 이주노동자는 ‘거짓말만 하는 놈’이 되어 버리고, 어떻게 하든 먹고살려고 발버둥치는 도시의 가난한 사람들은 ‘사회 질서를 어지럽히는 세력’이 되어버린다. 그들에게 인본적이고 인문적인 가치를 말하면, 당신 하는 짓이 사람으로서 할 짓이냐를 따지면, 그들은 ‘밥 먹여 주냐’는 말 한 마디로 모든 것을 무찌르고 의기양양한 사회의 파수꾼이 된다. 그러니 이런 판국에 무슨 세월호가 어떻느니, 위안부가 어떻느니 하면 나라 경제를 좀먹는 자, 정신병자 취급당하는 게 딱이다.
거짓도 괜찮고, 꼼수도 괜찮고, 오로지 나만, 우리만, 잘 살기만 하면 된다고 하는 그런 시대에 우리가 서 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다시 생각해 봐도 분명한 것이 하나 있다. 우리, 지금, 대단히 잘 살고 있다는 사실이다. 가까운 아시아 몇 나라만 여행을 해 본 사람은 우리가 얼마나 잘 사는지를 금방 알 수 있을 텐데 왜들 그러는지, 왜들 그렇게 잘 사는 것에만 목매달고 있는지, 정말 도대체 얼마나 더 잘 살아야 만족할 수 있을지 안타깝다. 물론 잘 사는 게 좋긴 하다.
그런데 그 잘 산다는 게 남들과 더불어, 함께 잘 살아야지, 혼자만 잘 살면 그 무슨 재미가 있겠는가? 경제가 성장을 좀 못 하더라도 사회가 안전하고 따뜻한 인간미가 서로 오가는 게 낫지 않겠냐는 말이다. 강도 강간이 횡행하여 보안업체가 늘어나서 일인당 국민소득이 늘어나는 사회가 정말 더 좋은 사회로 발전을 하는 것일까? 일을 많이 하여 돈은 더 벌지만 과도한 업무에 안전사고가 늘어나는 것이 과연 자신이 가고자 하는 그런 삶일까? 하루 종일 일만 하는 것보다 조금 덜 일 하고 조금 덜 받고, 그 시간에 영화도 보고, 낚시도 가고, 고향 초등학교도 찾아 가 보고 하는 게 더 낫지 않을까? 자가용이 없으면 옛날 같이 버스 타고 가면 될 거고, 핸드폰이 없으면 공중 전화기에서 줄 서서 기다리다 하면 되는 것 아닐까?
난, 오래 전부터 ‘사람이 산다는 게 그래서는 안 됩니다’ 라는 투로 학교 선생답게 말하곤 했다. 담론을 이야기 하고 당위성을 말했던 거다. 그런데 최근에는 그 톤을 조금 바꾸었다. ‘사람이 산다는 게 그렇게는 안 될 걸’이라고. 좀 더 실천 지향적이고, 싸움을 마다하지 않는 양상으로 바꾸어 가고 있는 중이다. 비판은 시작일 뿐, 끝은 되지 못한다. 사람 사는 세상을 만들려면, 대안을 제시하고 그걸 실행하여 새 판을 짜야 한다. 그 위에서 기존의 틀과 체제를 깨고 새로운 가치를 공유하는 사람들을 만나서 새로운 틀을 만들고 그 사이에서 연대하면서 작지만, 더디지만 뚜벅뚜벅 가야 한다. 2016년에는 새로운 판을 한 번 짜보자. 아주 작은 판일지라도 시간이 지나면 의미 있는 판이 될 수 있는 그런 판 말이다.
가난에 몸서리치고, 길이 보이지 않아 절망하고, 폭력에 신음하고, 가족이 헤어져야 하고, 다치고 질병에 쓰러지고, 죽을 때까지 일만 해야 하는 그런 이웃을 위해 나누고, 보태고, 관심 갖고, 돌아보고, 짐을 들어 주는 일에 작은 손이라도 뻗었으면 한다. 무지개는 먼 산에 있는 게 아니고, 우리 집 앞뜰에 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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