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공감의 불
작은 공감의 불
  • 정태영 기자
  • 승인 2016.01.20
  • 호수 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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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군 창원대 독어독문학과 교수

 

“따뜻한 말 한마디를 건넬 수 있는 마음이 사람을 구한다”

대학이 갈수록 힘들다. 기술 발전을 따라잡기에도 숨찬데 평생직장은커녕 신입사원에게조차 희망퇴직을 받는 고용불안은 그 어려움을 가중시키고 있다. 그러다보니 취업을 위한 학점, 스펙 등에 짓눌려 피곤에 지친 학생들은 강의실에 들어와서도 당장 취업에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면 거의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대부분의 과에서 많은 학생들이 전공과는 전혀 무관한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하고 있다. 취업과 관련하여 전공, 적성 등은 고려할 여유가 없다. 자리가 안정적이면 그만이다.

이런 학생들에게 순수 학문은 사치다. 마음의 여유가 없기는 우리 사회 전체도 마찬가지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마치 파도타기와 같은 삶을 살아간다. 예측하거나 대비할 수 없는 위험의 파도에 휩쓸릴까봐 늘 전전긍긍하며 일신과 가정의 안녕 외에는 다른 데 신경 쓸 여지가 별로 없다. 그만큼 이웃과 어려움을 함께 나누는 공감능력은 말라가고 있다.

이 와중에 제일 큰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은 변방으로 밀려나 자기 안전을 보장할 수단, 돈이나 학벌, 집안 배경, 교양이나 지적 소양을 갖추지 못한 사람들이다. 성과나 능력의 기준으로 보면 이들은 패배자요 무능력자들이다. 그러나 이들은 사회 전체의 짐을 자기들의 어깨에 지고 가는 사람들이다. 어느 사회고 경쟁을 피할 수 없다면 승자만 있는 사회는 있을 수 없다. 어느 사회에서든지 누군가는 패자가 되어야만 한다. 변방에 밀려나 있는 사람들은 지금 거기에서 그 피할 수 없는 자리를 차지하고, 그 누군가가 당해야만 하는 그 피할 수 없는 고통을 지금 거기에서 당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당하는 좌절과 차별과 멸시는 누구에게나 공포이다. 이러한 공포는 정도의 차이가 있을지는 몰라도 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우울한 그림자를 드리운다. 그러다 민감하고 약한 고리와 만나면 심각한 우울증과 파멸을 낳기도 한다. 실제 작년 12월 서울대학교 학생 하나가 우울증 끝에 유서를 남기고 자살했다. 그 우울증은 사실 우리 모두가 어느 정도는 이미 나눠 갖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다만 그것이 약한 고리를 만나 죽음을 불러오는 돌이킬 수 없는 병으로 깊어졌을 뿐이다. 어쨌든 그 학생의 여동생과 부모가 겪을 고통을 생각하면 마음이 너무 아프다. 그리고 유서 말미에서 ‘육체는 죽어도 정신은 살고 싶습니다.’라는 말을 접하면 자살에 대한 종교적, 윤리적 판단 이전에 그가 겪었던 고통에 한없는 연민을 느끼게 된다.

그런데 그 학생은 우울증의 고통 한가운데서도 실질적인 위안이 되었던 두 사람을 기억한다. 그중 누나라고 부른 한 여학생이 준 도움은 간단하다. “힘들 때 전화해, 우리 가까이 살잖아.”라고 건넨 말이다. 죽은 학생은 이 한마디로 몇 개월을 버텼다고 고백한다. 다른 학생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가 해 준 것은 공부에 필요한 이것저것을 챙겨주는 가운데 질문할 때마다 매번 안부를 물어준 것뿐이다. 사람을 구하는 데는 이렇게 작고 사소한 말 한마디만으로도 충분하다. 그와 대조적으로 그 학생은 우울증 환자에게 ‘다 잘 될 거야’라는 식의 위로는 절대 건네지 말라고 당부한다. 그런 위로는 도움이 되기는커녕 도리어 독이라고 말한다. 마음이 담기지 않은 의례적인 말이 얼마나 공허하고 허탈한지를 겪은 데서 나온 말일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무엇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지를 새삼 깨닫게 된다. 10만 명을 먹여 살릴 천재 하나를 키워내는 일도, 탁월한 지도력을 발휘할 영웅을 찾아내는 일도 중요하지만 그런 큰 일 이전에 허식과 의례의 껍질을 벗어버린 진정어린 말 한마디, 사람을 살리는 따뜻한 말 한마디를 건넬 수 있는 마음, 아픔과 어려움에 공감하는 마음을 키우고 확산하는 일이 더 중요하다. 사실 표시가 안 나서 그렇지 그런 작은 것들은 이미 우리 사회를 떠받치고 있다. 우리는 종종 실망하고 분노한 나머지 이런 사회가 왜 안 무너지는지 모르겠다고 말하는 사람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실제 뉴스를 보면 힘이 되고 위로를 주는 경우보다는 답답하고 화나고 걱정하게 만드는 내용을 더 많이 접하게 된다. 그러나 사회를 떠받치는 것은 그런 것들이 아니다. 도리어 지금 본 바와 같은 표시 안 나는 작은 따뜻함들이다.

이 점에서 브라질 작가 파올로 코엘료가 <알레프>라는 소설에서 들려주는 동화 같은 짧은 이야기 하나는 들을 만하다. 어떤 사람이 산꼭대기에서 하룻밤을 보내면 필요한 돈을 받기로 내기를 걸었다. 내기를 걸고 밖에 나오니 얼음장 같은 찬바람이 불고 있었다. 겁을 먹은 그는 친한 친구를 찾아가 사실을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친구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도와줄게. 내일 산 정상에 올라가서 정면을 바라봐. 내가 맞은편 산 정상에 올라가서 밤새 널 위해 불을 피우고 있을게. 그 불을 보면서 우리의 우정을 생각하라고. 그러면 몸이 따뜻해질 거야. 넌 내기에서 이길 수 있을 거고, 나중에 내가 너에게 뭔가 답례를 요구하지.” 그렇게 해서 그는 내기에서 이겼고, 내기에 걸었던 돈을 받아 들고 친구의 집으로 향했다. “네가 답례를 원한다고 해서 가져왔어.” 그러자 친구가 대답했다. “그랬지. 하지만 돈은 아니야. 언젠가 내 삶에 찬바람이 불어오면 나를 위해 우정의 불을 지펴주겠다고 약속해줘.”
찬바람이 거센 지금 우리 사회에 가장 필요한 것은 이런 작은 공감의 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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