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수 부산외국어대 교수

인문적 삶이라는 게 도대체 무엇일까를 곰곰 생각해본다.
한참 생각해보고도 뾰족한 답을 얻지 못한다. 그렇구나, 답을 낼 수 없는 문제에 접근하기 위해 여러 가지 길을 내놓고 고민하고 성찰하는 것이 바로 그런 삶이구나, 라고 생각한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르다고 규정하지 않는 것,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것, 아침에 생각하는 것과 저녁에 생각하는 게 달라질 수도 있는 것, 그냥 그대로 놔두면서 마음이 흘러가는 대로 따라가는 것, 물 흘러내려오면서 바위가 나오면 비켜가고, 소용돌이가 치면 빠져들고 하듯 자연의 이치에 따라 사는 것, 이런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한다. 다른 말로 하면 비움과 여백의 삶이 아닐까 한다.
끝도 없이 배우고, 그 배워서 쌓은 지식으로 채우고, 그 채움에 짓눌려 사는 현대인의 모습보다는 해가 뜨고 바람이 불고 사람이 지나가고 누군가가 지켜보는 그 맥락 전체가 동등한 하나로서 인정을 받으면서 사는 것, 부분이 특화되고 전문화 된 체계 위에서 만들어진 자신의 생각과 지식을 남에게 강요하고, 주입하는 삶을 버리는 것, 늦가을 까치 몫으로 감나무에 감 하나를 남겨두어 감나무 주인도 좋고 까치도 좋고 지나가는 행인도 좋고, 텅 빈 공간에 붉은 점 하나 찍힌 그 아름다운 풍경도 좋은 삶 그런 게 인문적 삶이 아닐까 한다.
그런데 이런 삶을 지금 여기 이 ‘헬조선’에서 어떻게 살 수 있을까? 과연 그렇게 살 수는 있는 것일까? 그렇게 산다면,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여 소외당하고, 밀려나고, 도태되어 결국에는 짓밟혀 살아갈 수밖에 없지 않을까? 누군들 그런 따뜻한 인간의 삶을 살기 싫어해서 그렇게 살지 않겠느냐는 볼멘소리가 나오지 않겠느냐는 말이다. 그렇다. 그런 볼멘소리가 나올 것이다. 하지만, 그 삶은 세상을 포기하자는 게 아니다. 달리 접근하자는 것이다. 주변의 작은 이들에게 인간미를 보여줘 감동을 주고 그 위에서 그들을 모아 벗으로 삼고, 그 벗들과 함께 살아가자는 것이다. 많이 갖지는 못하지만, 여유는 가지고 말이다. 어떻게? 예를 하나 들어 어떻게 사는 것이 인문적으로 사는 것이 될 것인지에 대해 생각해 보자.
최근에 일어난 위안부 문제와 관련하여 소녀상에 대해 한 번 생각해보자. 일본 정부는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모르겠지만 - 항간에 떠도는 소문대로 중국을 견제하기 위하여 미국의 압력에 한일 양국 정부가 서둘러 문제 해결을 하려 했다는 것이 사실인지 아닌지에 대해서는 우리 같은 범인들은 확인 할 수 없다.
위안부 문제를 빨리 그리고 분명하게 해결하고 싶어 했던 것 같다. 독일이 프랑스나 폴란드에게 진실한 사과를 할 의향은 전혀 없고 어떻게 해서든 정치적으로만 목적을 달성하려고 했던 것 같다. 그래서 형식적으로 사과를 했고, 돈으로 옭아맸고 윽박지르기까지 했다. 그런데 상대방에게 아무런 울림을 주지 못한다. 한국 정부 또한 마찬가지다. 국익이라는 계산으로 시민들을 설득하려는데 아무런 울림이 없어 감동을 받지 못해 긁어 부스럼이 되어 버렸다. 두 나라 정부 모두 마음을 내려놓고 계산을 버리고 진정한 사과를 하면 그 인간스러움에 상대방이 감동을 받을 수 있는 것임에도 그들은 그렇게 하지를 못한 것이다.
그런데 한국의 시민들이 이번 두 정부의 태도에 대해 갖는 감성은 사뭇 다르다. 그것은 서울 일본대사관 앞에 놓인 위안부 상의 이미지가 만들어낸 큰 기운으로 인해서라고 본다.
이런 가설은 무엇보다도 일본 정부가 그 소녀상을 이전시키는데 혈안이 되어 있다는 사실로 짐작할 수 있다. 도대체 그 위안부 상이 어떻기에 일본 정부는 그렇게나 큰 부담을 가질까? 일본 정부는 엄청난 규모로 일어난 반일 시위나 학자들의 질타 등은 사실 그냥 넘어가곤 했다. 그것은 지식과 정치의 무기로 싸우는 과학과 이성 위에 선 계산의 영역의 싸움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소녀상만은 그 영역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이 소녀상이 본래는 정치 사회적 영역의 물질이었는데, 시간이 흘러가면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예술 영역으로 자리를 옮겨버렸기 때문이다. 소녀상이 시민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감동을 자아낸다는 말이다. 이는 중국 난징의 위안부기념관 앞에 서 있는 위안부 상과 비교해보면 잘 알 수 있다.
중국 위안부 상은 잔혹하다. 한 여성은 임신을 해서 배가 산더미 같이 불러 있고 한 여성은 그 옆에서 흐느끼고 있고, 한 여성은 그 발밑에 산발한 채 쓰러져 통곡하고 있다. 분명한 역사적 사실을 재현한 것이지만,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부담스럽고 피곤하게 한다. 보는 사람이 스스로 감동을 일으킬 공간이 없다. 역사적 사실을 주입하는 이성적 방식이다. 반면 서울 일본대사관 앞에 있는 한국의 소녀상은 전혀 다르다. 여백의 미를 보여준다. 어린 소녀, 걸상에 앉아 있는 모습, 단아한 머리칼, 비어 있는 옆 의자 하나가 보는 이의 마음을 흔든다. 예술의 힘은 그것을 보고 느끼는 사람이 머무를 수 있는 여백에서 나온다. 그래서 예술은 학문보다, 정치보다, 선언보다 더 힘이 크다.
가르치고, 지적하고, 고치고, 버리고, 세우고 하는 방식은 이성의 방식이다. 잘잘못을 분별하는 사회과학적 방식이다. 그것으로는 궁극적으로 사람 사는 삶을 살기 어렵다. 설사 효과가 안 나오는 것 같더라도, 그래서 결국 실패할 것 같더라도, 우리 모두 아니 더 나아가 상대방의 마음까지 울림이 일어날 수 있도록 비워두고, 기다려주고, 대화를 나누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것이 더디 가도 사람이 살 수 있는 인문적 방식이다. 그 자리에서 비록 작고 하찮게 보일지 몰라도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이 생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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