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수 부산외국어대 교수

세상은 진리를 이루기 위해 서로 다른 방편들이 어우러져 판을 벌이는 곳
다른 의견에 대해 서로 건전하고 합리적으로 논쟁할 수 있어야…
무엇이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가에 대해 가끔 생각해 보곤 한다.
그러면서 ‘사람’은 살아 있다는 말에서 나온 것이겠다는 생각을 먼저 한다. ‘살아 있다’는 것. 무엇이 살아 있다는 것일까? 어떤 사물이나 현상에 대해 달리 볼 수 있다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다. 상황에 따라서, 어떤 이가 처하는 위치에 따라서 달리 보는 것이 살아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는 말이다.
하나로 정하지 않고, 그 하나 안에서 고정되지 않고, 사람에 따라 다를 수 있음을 인정하는 것, 그것을 나는, 살아 있는 것으로 본다. 그래서 나는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고 그 안에서 모두가 하나의 관점에서 보는 것을 썩 좋아하지 않는다. 그것이 진보의 입장이든 보수의 입장이든 별로 썩 내켜 하지 않는다. 내가 좋아하는 것은 누구든 다른 의견을 내고 그 의견에 대해 서로 진지하게 고민하면서 건전하고 합리적으로 논쟁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내가 말하는 생각이 달라야 한다는 것은 각 사람을 기준으로 하는 것만은 아니다. 한 사람이 시간의 흐름 위에서 이전과 다른 생각을 달리 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학생 때 생각했던 것과 학생을 가르칠 때 생각하는 것이 다를 수 있고, 자식의 입장에 있을 때와 부모의 입장에 있을 때도 그 생각이 다를 수 있다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다.
나이가 20대 일 때와 50대 일 때 세계관이 달라지는 것을 일부러 거역할 필요는 없다. 물이 흘러갈 때 바위가 나오면 바위를 안고 돌아가고, 험한 계곡이 나오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막 달리고, 소(沼)가 나오면 미친 듯 돌고 돌기를 수 없이 하듯 우리네 삶도 그래야 되는 게 아닐까, 난, 그렇게 생각한다.
그것을 이해하지 않고,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오로지 한 번 정해진 바 원칙에 따라 행동하고, 남을 규정하고 강제하니, 모두가 다 피폐해진다. 때로는 거짓말 할 수도 있고, 때로는 사내아이라도 눈물을 흘릴 수 있다. 길을 가다보면 샛길로 빠질 수도 잇고 유혹에 흔들릴 수도 있다. 그럴 수 있다, 네 입장에서는 그럴 수 있겠다, 라고 말을 하면서 그 옆에 설 때 그는 돌이켜 생각해보고, 스스로 제 갈 길을 찾는다.
그런데 이렇게 생각이 달라지는 것에 대해 한 가지 분명하게 해 둘 것이 있다. 자신이 진리로 삼는 것은 자신이 택한 방편을 통해 실행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무엇이 방편이고 무엇이 진리인가 하는 것은 각자 그 사람에 따라 달라질 수 있을 뿐 딱히 그 범주와 내용을 보편적으로 정할 노릇은 아닐 것이다.
인간의 생명과 인권을 존중하는 것이 내가 삼은 진리라고 한다면 그것을 실행하는 방법을 종교에 두느냐 아니면 정치에 두느냐 아니면 시민운동에 두느냐 하는 것은 방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하나의 진리를 안고 가는 사람들은 설혹 서로 다른 방편을 삼고 있을지라도 서로 돕고 함께 거드는 일을 해야 한다.
굳이 말하자면 연대라고도 할 수 있고, 십시일반이라고도 할 수 있고,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고도 할 수 있다. 그 안에서 그 방편에 대한 논쟁이 있으면 훨씬 건강하고 바르게 그 진리를 달성할 수 있지만, 그 방편에 대한 논쟁은 없고 오로지 ‘나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라’를 줄기차게 외치면 그건 사람이 하는 방식이 아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진리와는 달리 방편은 바꿀 수 있다, 라는 것이다. 정치를 하지 않겠다고 하는 사람이 정치판에 뛰어 든 사람을 물론 이해할 수 있다. 그것은 전형적인 방편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주체사상을 신봉하여 지상 낙원을 설파하고 다니던 사람들이 이제는 북한을 폭격하고 전쟁을 불사하겠다고 하는 사람들과 머리를 맞대고 정권 탈환을 운운하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
그것은 방편의 문제가 아니다. 두 상황의 차이는 그가 갖는 진리를 향한 단심(丹心) 여부일 것이다. 전자는 방편은 달라졌지만, 진리를 향한 단심은 그대로이고, 후자는 방편이 달라진 것보다 그 단심이 훼손되었다고, 나는 보기 때문이다. 그런데 꼭 한 가지 지켜야 할 것이 있다. 방편을 바꾸는 것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지만, 그 방편을 바꾼 사람이 해야 할 일이 하나 있다.
자신이 목청이 터지라 외쳤던 이전의 방편으로 인해 자신이 저질렀던 과오 특히 다른 사람들을 미혹하게 하여 잘못된 길로 들어서게 하였던 사실에 대해 우선 반성하고 진지하게 머리 숙여야 한다. 방편을 바꿀 때 진지한 자기 반성이 먼저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사람은 선동 모리배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 사람들은 방편을 바꾼 사람들이 아니고 진리를 바꾼 사람들로만 보인다. 아니 그러한 것이 애초부터 그들의 진리였는지도 모른다.
세상은 진리를 이루기 위해 서로 다른 방편들이 어우러져 판을 벌이는 곳이다. 오로지 하나의 진리와 방편만을 도그마(dogma)로 삼아 각축하는 곳이 아니다. 길을 가다가 세찬 비바람을 만나면 한 동안 비가 그치길 기다린 후 다시 길을 재촉할 수도 있고, 아예 푹 눌러 앉아 한참 뒤에 다시 출발할 수도 있다.
아예 가지 않고, 그곳에 눌러 앉아 살 수도 있다. 영화〈빠삐용〉에 나오는 두 주인공 가운데 사람들은 빠삐용이 보여준 불굴의 투지와 집념에 감동을 받지만, 난 탈출하지 않고 그 섬에 눌러 앉아버린 드가의 삶을 30년이 지난 아직도 잊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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