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군 교수 창원대학교 독어독문학과

우리나라에서 대학 전공으로서의 인문학은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지만 대학 밖에서의 인문학에 대한 요구는 점점 커가고 있다. 이런 흐름은 우리 역사를 보면 하나의 필연이다. 해방 이후 개발 독재의 시대를 거쳐 산업사회의 기반을 다지는 동안 사람들은 먹고 사는 생존의 문제에 골몰했다. 그 사이 삶의 궁극적인 의미와 가치의 문제는 돌이켜 볼 여유가 없었다.
하지만 인간은 어느 시대 어떤 상황에서든 그런 문제를 도외시하고 살 수 없다. 자기 스스로를 반성적으로 사유할 수 있는 능력이야말로 인간을 본능에 갇힌 동물과 구별하는 기준이고, 그런 반성적 사유에 의하여 스스로 삶의 의미를 발견하지 못할 때 인간은 결코 삶의 보람을 거두었다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만큼 자기 삶의 의미와 가치를 추구하는 것은 인간의 근본조건이다.
만약 이 조건을 무시한다면 그것은 파스칼이 말한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라는 정의에서 생각을 빼버린 존재와 같다. 이 점에 비추어 해방 이후 한국전쟁을 거치며 온갖 풍상과 어려움 속에서 가족을 지키고 나라의 기틀을 잡은 우리의 부모님 세대들은 그런 근원적인 질문을 할 줄 몰라서가 아니라 오직 자식들이 잘 살기만을 바라는 일념에 그런 질문 자체를 유보한 고맙고 미안한 세대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분들의 시대가 가고 어느 정도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된 지금, 삶의 궁극적인 의미와 가치는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문제가 되었다. 그러니 도처에서 인문학에 대한 갈구가 커지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인문학에서 추구하는 의미와 가치, 다시 말해 진리와 선과 아름다움은 감각과 물질을 초월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런 성격을 일컬어 한마디로 형이상학적이라 하였다. 이 형이상학적 차원은 계산과 측정과 실험을 넘어선다. 거기에서는 다양한 입장과 시각이 나름대로 일정한 타당성을 지니고 가치와 의미들에 접근하지만 어느 하나의 결론으로 ‘증명 끝’ 하고 종결지을 수 없다. 일례를 들어 몇 년 전 어려운 학문적 담론으로서는 보기 드물게 큰 반향을 일으켰던 마이클 샌덜의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고대 이래 다양한 윤리 이론이 소개되는데, 각기 일정한 타당성을 지니고 시대의 흐름에 따라 어느 정도 일정한 발전을 확인시키지만 최후에 가서 어떤 하나의 이론으로 수렴돼 완전한 해결을 보지는 못한다. 역사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어떤 역사적 사건이나 진행이 사람들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인가 아니면 시대의 조건들이 낳은 것인가의 문제는 결코 어떤 최종적인 결론에 이를 수 없다. 이론과 시각의 이러한 상충과 공존은 문학과 예술에 이르면 더 심각해진다. 모더니즘 이후의 현대에 이르기까지 상식을 깨는 충격적인 반발과 도발이 빈번해 도대체 무엇이 아름다움인지 자체가 의문시될 지경이다. 오죽하면 ‘추의 미학’이라는 개념이 공공연히 논의되겠는가.
그러다 보니 인문학을 모순이 내재된 여러 이론과 시각이 공존하는 학문, 관용과 여유라는 이름으로 모순을 적당히 용인하고 눈감아주는 학문으로 여기는 경우가 많다. 이것은 인문학에 대한 오해의 소치로서 ‘과학’으로서의 인문학을 부인하는 태도이다. 일정한 타당성을 지닌 이론과 시각이 공존할 때 어차피 정답이 없으니 마음대로 말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어차피 아름다움 자체란 없는 것이니까 각기 자기 좋을 대로 만들고 감상해도 된다는 말도 아니다. 그와 정반대로 인문학은 근본에 있어서 자연과학보다 더 과학이기를 지향한다.
플라톤은 이미 『국가론』에서 인문학적 진리의 수준이 수학이나 자연과학보다 우위에 있음을 명확히 제시하였다. 그 성격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다만 인문학이 추구하는 진, 선, 미가 감각과 물질을 초월하여 인간의 사유로서는 ‘이루 다 헤아릴 수 없고’ 인간의 언어로는 ‘이루 다 형언할 수 없다’는 데 문제가 있을 뿐이다. 비유를 하나 들자면 큰 산을 오르는 길은 여러 갈래가 있을 수 있는데 그중 어떤 길을 택해도 산을 오를 수 있다. 그러나 정상에 오르기 전까지 모든 길은 다만 오르는 과정일 뿐이다.
어느 길도 도중에 산에 올랐다고 말할 수 없고 오직 정상에 올라서야만 산에 올랐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게 모든 길을 하나로 수렴하는 정상이 학문으로 말하면 ‘궁극적인 해답’이다. 그 해답이 자연과학의 경우는 실험, 관측, 계산을 통해 도달할 수 있는 현실의 물질적 차원 안에 있다면, 인문학의 경우는 그것을 초월하는 더 높은 차원에 있다. 때문에 인문학적인 해답은 지금 여기에서는 ‘이루 다 헤아릴 수 없고, 이루 다 형언할 수 없는’ 것에 머물 수밖에 없고, 우리에게 허용된 것은 다만 그것을 향한 가능한 최선의 길을 열심히 찾아나서는 것뿐이다.
이 점에서 인문학이 추구하는 바는 Christina Rossetti의 시 ‘누가 바람을 보았는가?’에서 말하는 바람과 같다. 바람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다만 바람이 지나갈 때 나뭇가지에 매달려 떨고 있는 나뭇잎과 머리를 숙이는 나무를 보고 알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바람이 지나감을 알려준다 해서 나뭇잎과 나무는 바람을 다 표현한 것은 아니다. 바람은 여전히 ‘이루 다 형언할 수 없고, 이루 다 헤아릴 수 없다.’ 인문학은 꼭 그와 같다.
때문에 인문학에는 채워지지 않은 빈 구석이 늘 있게 마련이다. 그 빈 곳은 채워지지 않음에서 오는 갈증을 끊임없이 불러일으키지만 그 갈증은 다만 안타까움으로 사람들을 여위게만 만드는 부정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자체로 크나큰 축복이기도 하다. 영원한 인문학적 주제 ‘사랑’을 생각하면 그것을 잘 이해할 수 있다.
누가 사랑을 보았으며, 누가 사랑이 무엇인지를 다 말해 줄 수 있는가? 사랑은 우리에게 언제나 ‘이루 다 헤아릴 수 없고, 이루 다 형언할 수 없는’ 무엇에 머문다. John Denver와 Placido Domingo의 노래「아마도 사랑은 Perhaps Love」의 가사처럼 사랑은 언제나 우리에게 ‘아마도’의 차원에 머문다. 그것은 자체로 안타까운 목마름이다. 그렇지만 사랑은 우리를 그저 안타까움에만 내버려 두지 않고 청년 괴테에게서처럼 우리 마음을 늘 새로운 경탄으로 이끌기도 한다.
첫사랑을 품은 청년 괴테는 “자연은 내게 / 얼마나 환히 빛나는가! / 태양은 얼마나 광채를 발하는가! / 들판은 어찌 웃는가!”라고 그저 경탄해 마지않으며, 자기를 그렇게 경탄케 만드는 사랑은 “종달새가 노래와 / 대기를 사랑하는 / 아침 꽃들이 / 하늘 향기를 사랑하는” 것과 같은 사랑이라고 말한다. 인문학이 추구하는 주제는 바로 이런 사랑과 같다. 그것은 자체로는 ‘이루 다 형언할 수 없지만’ 적절한 수단과 표현을 통해서 의심의 여지없이 명백하게 자신을 드러내어 찾는 자를 경탄케 만든다.
물론 그 길이 괴테의 체험과 같은 행복으로만 점철되어 있지 않다. 거기에는 암중모색의 고통이 필수적으로 수반된다. 그러나 한밤중의 순간적인 번개에 언뜻 비친 찬란한 궁성이 이내 다시 칠흑 같은 어둠에 묻힌다 해도 그 궁성의 존재를 한번 본 사람은 어둠의 고난을 불사한다. 그렇게 뜻한 바를 찾아가는 여정이 인문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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