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을 받거나 분노를 달래는 것을 넘어서야
구원을 받거나 분노를 달래는 것을 넘어서야
  • 정태영 기자
  • 승인 2016.03.09
  • 호수 337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광수 교수 부산외국어대 인도학부

 

세상은 내적 성찰의 대상이 아닌 외적 실천의 장

슬픔은 기쁨보다 오래 가고, 무겁게 남는다. 그래서 기쁨을 맞는 기쁨보다 슬픔을 당한 슬픔으로 우리 인생은 짓눌러지곤 한다. 그래서 부처가 인생은 고통의 바다라고 한 말이 이렇게 가슴에 와 닿는 것일까. 아무리 회자정리(會者定離)라 위로하여도 만남 뒤에 오는 이별은 못 견디게 슬프다. 슬픔 중의 슬픔은 죽음으로부터 온다. 외할머니께서 돌아가신 뒤 어느 날 어머니께서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한 번만 당신의 어머니를 만나봤으면 좋겠다고 하시면서 눈시울을 붉히셨다. 아니 만나지 못해도 좋으니 먼발치에서 딱 한 번 만 보기라도 했으면 좋겠다면서.

죽음의 주변이 항상 시끌벅적한 것은 그만큼 죽음이 우리에게 위기를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한국의 전통 장례를 보면 저녁 내내 술판에, 화투판에 어떻게 보면 흡사 무슨 놀이판 같다. 그것은 공동체를 이루는 한 구성원이 떠남으로서 발생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지혜로 인해서이다. 살아 있는 사람들이 그들을 위해 취할 수 있는 최선의 사회화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청준이 장례를 축제라 한 것은 장례로써 사람들이 모이고, 그 자리에서 얽히고설킨 감정들이 풀리고, 그동안 묵혀졌던 응어리가 녹아 떠난 이가 남긴 공동체가 새롭게 시작되는 계기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슬픔이라는 것은 항상 그렇듯 슬픔으로만 남아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사람에 따라서는 혹은 때에 따라서는 희망으로도 바뀌고 용기로도 승화되기도 한다.
연꽃이 뻘밭에서만 피어나는 것에서 슬픔의 이치를 깨달을 수 있다. 봄바람이 볼에 닿는 감촉이 훈훈한 것은 그것이 모진 겨울 뒤에 불기 때문이다. 항상 따뜻하고 물도 풍부한 곳에서 자란 나무는 여리지만, 바람이 세차고 메마른 곳에서 자란 나무는 더할 나위 없이 단단한 것 또한 이런 이치의 소산이다.

따뜻한 남쪽 나라에는 사시사철 꽃이 핀다. 그런데 사람들은 꽃이 피어 있는지를 모르고 사는 게 보통이다. 그것은 아름다움이라는 게 존재론적으로 아름다워서가 아니고 아름답지 못한 것들을 극복하고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전쟁터에 피는 장미 한 송이에 더욱 주목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자연의 이치가 항상 사람 사는 이치와 똑같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둘 사이에는 그런대로 통하는 점이 많다. 삶의 향기라는 게 풍요롭고 편안한 환경에서 자란 사람으로부터 보다는 부족하고 어려운 환경 속에서 발버둥 치면서 자라 나온 사람으로부터 배어 나오는 것을 보면 그 이치가 사람 사는 세상이나 자연이나 할 것 없이 모두가 통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모든 게 연결되어 숨 쉬는 이 세상에 종교의 일방적 한 측면이 세상을 뒤흔든다. 기독교는 구원을 위한 방편이기 이전에 우선 정의를 위한 방편이었다. 그런데 기독교를 따르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오직 예수, 구원에만 관심을 갖는다. 목사가 더러운 돈 수천억 원을 뒤로 빼돌려도 오로지 구원만 있으면 된다고 하는 사람들이 지천이다. 불교는 양 극단을 배제하고 중도의 바른 길을 추구하는 것이지, 모든 잘못된 것에 그냥 넘어가라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도 불교를 따르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잘못된 일에 비판하기보다는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는 것에만 기울어 있다. 심지어는 자신을 강간한 어느 여성의 친아버지를 그냥 용서하고 자기 마음을 다스리는데 전념하라고만 말하는 유명한 승려도 있다. 이건 아니다.

세상이라는 것은 혼자 사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어느 특정인의 행위의 결과가 그 특정인 자신에게만 미치는 것이 아니다. 그 자신의 잘못된 행위는 그 자신을 파멸의 구렁텅이로 몰아가기도 하지만 그 자신과 아무런 관계도 없는 남을 파멸시키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구원만 쫓아서도 안 되고 세상에 대한 분노를 참아서만도 안 된다.

그것은 잘못된 세상을 긍정하고, 거기에 적응하는 결과를 가져오고 결국 또 다른 희생자를 끊임없이 만들어가는 시스템으로 연결될 수밖에 없다. 가톨릭에서는 ‘내 탓이요’라고 하지만, 모두 내 탓일 수만은 없다. 내 탓으로 돌려 세상이 바뀔 수만 있다면 더 이상 좋을 수는 없겠지만 그런 세상은 오지 않는다. 세상 악의 근원이 내 안에 있는 세상은 혼자 사는 세상이요, 변화를 부정하는 세상일 수밖에 없다. 거기서 더불어 사는 세상을 바라는 것은 연목구어요 어불성설이다. 얼마 전 돌아가신 신영복 선생은 인간의 적응력을 행복의 요람인 동시에 용기의 무덤이라 했다.

적어도 인간들에 의해 발생하는 비극에 대해서는 그 원인에 분노를 쏟아야 한다. 그래서 그 세상을 파괴해야 한다. 파괴는 곧 창조이고, 파괴 없는 창조란 없으며 파괴하는 것만이 세상을 더불어 사는 세상으로 유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몸에 상처가 나면 참지 말고, 그 상처를 도려내야 하는 것 아닌가. 도려내는 것은 순간의 아픔이지만, 몸이 살기 위한 최선의 방법이지 않은가. 그렇지 않고 그 아픔을 참고 견디면 결국 몸은 썩고 이내 죽고 만다. 세상은 내적 성찰의 대상이 아니라 외적 실천의 장이기 때문이다.

물이 컵에 반이 차 있는 것을 두고 반밖에 차 있지 않다고 하는 사람은 부정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고, 반이나 차 있다고 하는 사람들은 긍정적 사고를 지녔다고들 한다. 그리고 그 긍정적 사고방식을 지닌 사람이야 말로 세상에 필요한 인재라고들 한다. 동의할 수 없다. 물이 반이나 차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 감사함으로 복도 받고, 축복도 받고, 행복도 받겠지만 세상은 그 나머지 반을 채우지 않은 상태로 갈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난 반이나 차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야 말로 바로 부정적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이요, 반밖에 차지 않았다고 하는 사람들이야 말로 긍정적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이라고 평가한다. 그것은 후자로 인해 세상이 긍정적으로 바뀔 수 있기 때문이다.

끊이지 않는 악의 순환에 적응하면 안 된다. 그것은 우리 다음 세대에 죄를 잉태하여 물려주는 것이다. 가슴 아프고 억장이 무너질 정도로 슬픈 일일수록 그 앞에서 냉철해야 한다. 그리하여 그 원인을 차오르는 분노로 파헤쳐야 한다. 구원에만 매달리거나, 분노를 달래거나, 흐르는 시간에 적응하거나, 신비주의에 빠져서는 안 된다. 나만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 주변에 있는 또 다른 나 그리고 그 나를 둘러싸고 있는 또 다른 나들이 그런 슬픔을 겪어선 안 되지 않는가. 그러기 위해선 싸워야 한다. 세상이 미쳤으니 싸우자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삶은 전쟁이고 그 삶은 피곤하다. 하지만 그 삶 안에 참다운 가치가 있다.




  • 서울특별시 구로구 공원로 70 (대한산업안전협회 회관) 대한산업안전협회 빌딩
  • 대표전화 : 070-4922-2940
  • 전자팩스 : 0507-351-7052
  • 명칭 : 안전저널
  • 제호 : 안전저널
  • 등록번호 : 서울다08217(주간)
  • 등록일 : 2009-03-10
  • 발행일 : 2009-05-06
  • 발행인 : 박종선
  • 편집인 : 박종선
  • 청소년보호책임자 : 김보현
  • 안전저널의 모든 콘텐츠(영상, 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본지는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 윤리강령 및 실천요강을 준수합니다.
  • Copyright © 2025 안전저널. All rights reserved. mail to bhkim@safety.or.kr
ISSN 2636-0497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