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가 죽고 스승이 사라진 시대를 목 놓아 운다
종교가 죽고 스승이 사라진 시대를 목 놓아 운다
  • 정태영 기자
  • 승인 2016.03.16
  • 호수 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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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수 교수 부산외국어대 인도학부

 

2016년 벽두에 국회에서 굿판이 벌어졌다. 2016 병신년(丙申年) 합동 국운 발표회에서 벌어진 행사다. 그들이 벌인 ‘재수 굿’은 집안의 평안, 가족의 화복과 건강, 생업의 번성 등을 기원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헌데 이 일에 대해 모 기독교 단체가 ‘굿판으로 망한 구한말의 역사를 보라!’는 논평을 발표했다. 참으로 오만하기 이를 데 없다. 기독교에서 하는 구국부흥성회나 불교에서 하는 세계무차대회는 괜찮고, 무교에서 하는 굿만 되지 않는다는 것은 독단이다.

구한말 나라가 망했는데 그것이 굿과 관련이 있다면, 나라가 망해 가고 있음에도 그 원인을 정확하게 분석하지 않고, 굿이라는 종교 의례에만 의존해서 그런 것이지, 무교라는 종교의 의례를 행해서 그런 것은 아니다. 그 때 기독교에서 그 상황에서 구국대성회를 열었다면 그 또한 망국의 길로 가게 했을 것임은 분명하다.

문제는 종교가 사람들의 삶에 어떠한 역할을 하고, 사회에서 어떤 기능을 할 것인가이다. 기독교만 옳고, 다른 종교는 옳지 않음을 주장하고 논쟁하기 전에 종교의 사회적 기능을 두고 이야기 하는 것이 이 사회의 건강성을 되찾는 데 더 필요하다. 사실, 종교를 뭐라고 정의하는 것은 쉽지 않다.

각 종교가 발생하는 문화권마다 종교가 무엇인지 규정하는 것이 다 다른데다가, 학문적으로도 모든 종교를 포괄적으로 담아낼 수 있는 범주가 마땅치 않기 때문이다. 기독교나 이슬람 권역에서는 종교를 이분법적으로 보았고, 힌두교와 불교는 삶의 다양한 방편으로 보았으며, 유교나 도교는 인간 간의 관계와 윤리의 근간으로 보았다. 이렇게 종교의 의미가 모두 다른 상황에서 어떤 종교적 행위가 옳은 것인지, 어떤 종교적 행위가 그른 것인지를 판단하기 어렵다.

같은 종교 안에서도 각자가 추구하는 길은 다르다. 어떤 기독교인은 예수의 정의를 진리로 받드는 반면 어떤 기독교인은 바울이 강조한 구원을 받든다. 어떤 불교도는 다 버리고 세상 밖으로 나가 깨달음을 추구하라고 강조한 붓다를 받들지만, 어떤 불교도는 의례와 적선을 통한 극락왕생을 추구한다. 모두가 보는 사람에 따라 종교는 그 성격도 다르고, 그 기능도 다르다. 초월의 세계도 옳을 수 있고, 물질의 세계도 옳을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종교를 어떻게 바라보고 대하는가’이다.

지금과 같이 다원화된 사회에서 종교는 사회를 구성하는 다원 요소 가운데 하나에 불과해야 하다. 그것이 살아 있는 것은 그 중심이 다양한 관계 안에서 오로지 인간을 향할 때 살아 있는 것이 되고, 그것이 죽은 것은 그것이 인간을 향하지 않고, 권력이나 조직 혹은 돈을 행하고 그것으로 인간을 핍박할 때 죽은 것이다.

그 경전이 얼마나 논리적인지, 얼마나 계시적인지, 어떤 종교를 믿는 사람들이 사회에서 성공하고, 힘을 쓰는지도 중요하지 않다. 오로지 모든 종교가 공히 부르짖듯 사람이 하느님이고, 사람이 우주며, 사람이 곧 붓다라는 관점에서 특정 종교인들이 얼마나 사람을 존중하고 사람을 중심에 놓고 종교 행위를 하는 것인지를 봐야 하는 것이다. 오로지 ‘우리’와 ‘적’을 가르는 이분법만 있으면 그것은 이미 사람을 향하는 종교가 아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참다운 종교를 상실한 시대다. 스승도 없고, 이웃도 없고, 정의도 없다. 사람다움을 상실한 더러운 세상에 우리가 서 있다. 사람들이 존경하고 의지하며 가르침을 받고 싶어 찾아가서 말씀을 듣고 싶어 하는 곳이 없다. 스승도 없고, 기댈 곳도 없고, 돌아갈 곳도 없는 그 세상이 어찌 미치도록 외롭지 않겠는가.

남자가 바람을 피워 사랑했던 여자와 헤어질 수밖에 없을 때 “미안해 마음이 변했어, 그래도 널 사랑했어. 널 보내서는 안 되는데, 미안해...”라고 해야 한다. 아니, 그런 마음이 들어야 한다. 사랑이 식고, 변하는 것은 어쩔 수 없더라도 그에 대한 미안함이 있어야, 고개를 감히 들지 못해야 하는 법이다.

이 땅이 종교가 한 때는 그러했다. 서울 청계천에서 쫓겨나 갈 데 없는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새벽을 깨우는 목사도 있었고, 돈과 권력에 저항하면서 인민들의 편에 선 승려도 있었고, 독재 정권에 핍박 받는 젊은 청년들을 받아주고 보호해준 신부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무도 없다. 시대의 스승은 바라지 않는다만 제대로 된 사람조차 찾기 어렵다. 사회의 평범한 일반인들이 갖는 양심 정도라도 갖는 목사, 승려, 신부를 찾기가 너무나 어렵다. 그들이 앗아간 것은 고통 받는 사람들이 마지막 기대고 싶은 희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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