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수 교수 부산외국어대 인도학부

이주민은 일하는 기계가 아닌 함께 가꾸어 가야 할 다문화의 주체적 사람
인간의 이주는 수 천 년 동안 진행되어 오고 있지만 노동력 제공을 목적으로 하는 이주는 2차 세계대전 이후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주로 갓 식민 상태에서 벗어난 나라들에서 식민 종주국으로 이주해 간 이주민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차츰 공동체를 형성해갔다. 그러면서 세계 각 지역에서 일어난 그들의 공동체 형성은 일정한 유형을 띠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주요한 성격을 살펴보면, 젊은 남자의 단신 이민으로 시작했다가 그곳에서 나름대로의 경제적 목표를 이루어가고 사회적으로 적응하면서 체류를 연장하고 사회적 네트워크를 조성한다. 그 후 그 종주국에서 허용하는 바에 따라 가족을 초청하여 비로소 가족 재통합이 이루어진다. 이후 자신이 속한 종족 공동체를 형성하는 단계를 거친 후 영주 단계에 들어간다. 여기에서 마지막 단계인 영주 단계에서는 이민을 받아들인 정부와 주민들의 대응 여하에 따라 시민권을 획득하여 이전보다 훨씬 안정된 지위를 얻게 되는 경우도 있지만, 그와 반대로 정치적 권리를 인정받지 못하고 사회 경제적 주변으로 밀려나 소수 종족 집단의 지위로 떨어지는 경우도 많다.
그 어떤 경우에서도 한 가지 분명한 것이 있다. 그들은 노동을 제공하기 위해 이주를 하였으나 그것이 단순히 물리적인 이동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주자는 자신의 사회문화적 정체성을 갖고 그에 따르는 종교 체계, 가족-친족 규범과 가치 체계, 의식주와 언어 관습 등을 한 데 담아 함께 이동하는 것이다.
이민 가방 안에 보이지 않고 만질 수 없지만 떼고 갈 수 없는 것들이 그득히 담겨져 따라가는 것이다. 그래서 이주를 하는 것은 서로 다른 문화가 만나 새로운 문화를 만드는 것이다. 받아들이는 쪽은 일하는 기계를 수입하는 것이 아니고, 사람을 불러오는 것이다. 그들 이주자는 자신의 모국과 결코 단절하면서 지낼 수도 없고, 새로운 이주 사회에서 마냥 변두리에서만 살 수도 없다. 그렇지만 현실은 떠나온 데에도 끼지 못하고 정착한 곳에도 끼지 못하는 부초와 같이 지내는 경우가 많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들은 이주해 간 지역에서 어느 정도 기반을 다지고 자신의 종족 공동체를 형성해가지만 항상 떠나온 고향과 모국을 잊지 못하는 상태를 유지한다. 그렇다고 여건이 허락한다 해도 쉽게 다시 돌아가지 못하는 상태에 놓인다. 그들은 ‘떠나온 곳을 그리워하나 지금 이 자리에 속해 있는’ (longing but belonging)이들이다.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그러나 그곳을 잊지 못하는 그들은 결국 모국과 정착국 양 쪽에 걸쳐 있는 다중인일 수밖에 없다.
그러다보니 그 다중인에 대한 시각은 참으로 애매하고 불분명하다. 한국의 경우 요즘 부쩍 ‘다문화’를 말하면서 그 다문화와 사회 통합을 위해 그들에게 한국어와 한국 문화에 대한 교육을 잘 시켜야 한다는 주장을 쉽게 말하곤 한다. 정작 한국인이 그 이주민의 본국 언어와 그 문화를 배워야 한다는 주장을 제기하는 경우를 찾아보기는 힘들다. 이주민을 수용하는 한국의 사회 구조와 문화만 주장하다 보니 겉으로는 다문화를 지향하지만 속으로는 통합을 강요하는 태도를 낳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방글라데시나 베트남 혹은 필리핀이나 캄보디아에서 온 친구들이 한국의 사회와 문화를 얼마나 잘 적응하고, 갈등을 겪는지에 대해서만 관심을 둘 뿐, 그들 모국의 사회와 문화에 대해서는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들 이주민이 한국 땅에 들어와 겪는 어려움을 쳐다보고 그 의미를 파악하면서 한국 사회의 야만성을 성토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주 노동자가 겪는 여러 가지 열악한 조건 예컨대, 장시간의 노동, 언어와 음식의 차이, 한국인의 차별 등을 통해 한국 사회와 문화의 어떤 특질이 그들의 사회화에 부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목소리가 많아 들린다.
분명 한국 사회의 잘못된 부분을 고쳐 그들과 더불어 사는 체계를 만들어내려는 순수한 생각일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그들은 여전히 우리에게 대상화된 존재로서 ‘타자’가 된다. 남이 아닌 우리의 일원으로, 받아들이기 위해서가 아닌 함께 하기 위해서는 한국 사회도 중요하지만 그들 사회와 문화에 대한 이해가 반드시 병행되어야 한다. 못 사는 나라에서 온 일하는 기계로서가 아닌 함께 가꾸어 가야 할 다문화의 주체적 사람으로서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들이 궁극적으로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다면, 우리가 사는 곳의 일부가 그들의 제2의 고향이 될 수 있도록 자리를 깔아줘야 한다. 이것이 우리가 가야할 내일의 초국가적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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