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군 창원대학교 독어독문학과 교수

봄날을 가득 채운 생기 앞에
인간의 창조물은 덧없는 존재일 뿐
봄이다. 햇살이 따사로워지자 사방에 싹이 트고 꽃이 피어난다. 남녘에는 벌써 매화가 지고 있다. 아쉬워할 사이도 없이 벚꽃 망울이 한껏 부풀었다. 조금 있으면 과수원도 여기저기 물들 것이다. 복숭아꽃이 피면 이내 배꽃이 필 것이다.
도시 사람들이 쉽게 접하기 어려워서 그렇지, 이런 꽃들에는 더 깊은 맛이 있다. “이화에 월백하고 은한이 삼경인제”라는 이조년의 옛 시조 구절에서처럼 은하수가 자정으로 기울 무렵 달빛에 비치는 배꽃은 그냥 마음속에 그려보기만 해도 깊이 감춰졌던 하얀 그리움이 밀려들 것 같다. 그리고 복숭아꽃은 아마도 가장 봄다운 꽃이 아닐까 싶다. 특히 가까이서보다 멀찍이 떨어져 건너편 언덕이나 산비탈에 핀 것을 바라볼 때 은은히 젖는 그 연분홍 빛깔에 무덤덤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봄을 노래한 두보의 절창 「봄밤의 단비 春夜喜雨」에 나오는 “이른 아침 붉게 젖은 곳 바라보니 / 금관성의 활짝 핀 꽃들 비를 함뿍 머금었겠구나 曉看紅濕處 / 花重錦官城”라는 구절도 복숭아꽃의 아름다움을 기억하는 사람이라야 그 깊은 맛을 제대로 느낄 수 있다.
이렇게 꽃을 보고 좋아하는 것은 큰 즐거움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벚꽃 철이 되면 필사적으로 집을 나선다. 마치 놓치기라도 하면 큰 손해라도 볼 듯이. 그 모습을 가만히 보노라면 가끔은 ‘꽃구경마저 스트레스가 되는구나.’라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게다가 속절없이 지기라도 하는 날에는 꽃을 보는 즐거움마저 참 덧없어지기도 한다.
하지만 봄날은 단순한 즐거움의 차원을 넘어서는 경이(驚異)로 풍성하다. 누구나 한두 번쯤은 그런 기억이 있을 것이다. 나는 어릴 적 내가 자란 집 뒤란에 장군란이 움터 나오는 것을 처음 보았을 때의 감동을 잊지 못한다. 그것을 보는 순간 별안간 마음이 환해지면서 흐뭇한 기쁨에 사로잡혔던 기억은 지금도 생생하다. 이것은 순수한 동심에게 주어지는 소중한 선물이다.
어른이 되면 극한 상황일수록 경이의 체험이 더 극적이다. 시인 김지하나 독일의 작가 볼프강 보르헤르트 Wolfgang Borchert가 모든 것을 박탈당한 감옥 안에서 우연히 민들레꽃을 발견하고 삶의 희망을 되찾았다는 이야기는 그 좋은 예다. 순수한 동심에서든 혹은 삶의 극한상황에서든 이렇게 존재와 존재가 순수하게 만나는 곳에 경이가 일어난다. 이 경이에는 또한 싱그러운 기쁨이 수반된다. 그 기쁨은 즐거움 끝에 겪는 환멸처럼 시들지 않는다. 서양의 역사에서 성 프란치스코는 풀과 꽃뿐 아니라 바람과 구름, 물과 불 등 무생물에게서조차 그런 경이와 기쁨을 누린 사람으로 유명하다.
그런데 이런 경이와 기쁨이 인공지능에게도 가능할까? 얼마 전 이세돌 기사와 구글의 알파고의 바둑대결을 기화로 우리 사회에 인공지능의 광풍이 휩쓸고 지나갔다. 그 와중에 적지 않은 사람들이 약 인공지능 단계를 지나 스스로 자의식을 갖게 되는 강 인공지능 단계가 되면 스티븐 호킹 박사가 예언했듯 인간이 기계의 노예가 되는 시대가 오는 게 아닐까 두려워하기도 하였다.
실제로 그런 상황이 오면 우리가 누렸던 경이와 기쁨은 어떻게 될까? 그것마저 인공지능에 못 미치는 형편없는 노예의 것이 되어버리는 것일까? 이런 두려움은 과학주의적 입장에서 보면 충분이 가능한 일이다. 실제 대국 전후 여러 대담이나 분석에서 적지 않은 전문가들이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먼 미래에는 가능할 수도 있는 것처럼 걱정하였다.
과연 그럴까? 인문학자의 눈에 그것은 한마디로 과학주의 맹점이 낳은 어리석은 공포에 불과하다. 알파고가 ‘창의적인’ 수를 두었다고 다들 놀라워했지만 그것 역시 확률을 도입한 ‘연산’의 결과일 뿐, 연산은 어디까지나 연산이다. 고도의 연산을 수행하다 보면 혹시 어느 순간에 기계도 순수한 의미의 ‘창의적인’ 차원으로 비약하지 말라는 법이 없지 않는가라고 반론할지 모르나, 그것은 우연이 필연을 낳는다는 터무니없는 추론이다. 그것은 ‘과학’이 스스로의 존립기반 자체를 허무는 황당한 추론이다.
경탄과 기쁨은 인공지능과는 차원을 전혀 달리 한다. 이는 기계적인 연산이 미치지 못하는, 살아있는 의식에게 고유한, 그것도 선물로 주어진 초월적 차원이다. 한마디로 경탄과 기쁨은 생명에 고유한 신비로서 언제나 인간과 인간이 만들어낸 모든 것을 초월한다. 인간은 다만 그것을 선물로서 누릴 수 있을 뿐이다. 의식이 있는 인간은 그래도 자신의 힘으로 그 초월적 차원에까지 늘 손을 뻗치려고 한다.
인공지능에 대한 두려움도 실은 그 바닥을 들여다보면, 인간이 만들어낸 것을 통해 혹시 우연을 통해서라도 그 초월적 차원에 닿고 싶어 하는 생각의 이면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생명에 이르는 그 길은 근원적으로 인간에게 막혀 있다. 히브리인들은 인간 존재의 그 가장 깊은 진리를 꿰뚫어 보고 성경에 기록하기를 창조주께서 인간이 “손을 내밀어 생명 나무 열매”를 따먹지 못하도록 에덴 동산에서 내친 후 “천사들과 번쩍이는 불 칼을 세워, 생명 나무에 이르는 길”을 가로막았다(창세기 3, 22-24 참조)고 기술하였다.
인간 존재의 이런 진실은 어떤 뛰어난 인공지능이 출현하였다 하여 조금도 바뀌지 않는다. 결국 모든 것은 사람의 문제이고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코헬렛 1, 9) 중요한 것은 언제나 어떻게 인간이 스스로를 다스려 자신에게 재앙이 되지 않는가에 달려있다.
봄날을 가득 채우고 있는 생기는 인간이 만들어낸 모든 것이 얼마나 덧없는 것인가를 웅변으로 증언한다. 인간이 엄청난 슈퍼컴퓨터의 연산으로 빅뱅의 순간까지 추적하여 물질적 조건을 만들어낸다 한들 그 넘어 무(無)로부터 불어오는 생명의 바람을 어디에서 불러낼 것인가? 봄날은 그 생명의 바람을 이미 가득히 품고 있는데 말이다.
지금 그 생기가 풀과 나무, 꽃과 싹, 돌과 물 등을 통해 주체할 수 없이 뻗쳐 나오고 있다. 다만 우리의 눈과 귀가 닫혀 있어 안타까울 뿐이다. 그 닫힌 눈과 귀를 열어주는 것이 경이의 선물이다. 이 봄 그 소중한 선물이 우리 마음에 풍성하게 내려 천지에 가득한 생명을 가득히 누릴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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