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하민 근로복지공단 안산산재병원 정신과장
올해 추석도 어김없이 수천만에 이르는 민족 대이동의 진풍경이 펼쳐졌다. 지금은 교통 여건이 좋아져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고향에 다녀올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절만 되면 그 많은 사람들이 평소보다 두세 배에 달하는 시간을 기꺼이 도로에 허비하면서까지 고향에 가는 것이 신기하게 느껴진다. 농경사회에서 비롯된 명절이 현대인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 것이기에 여전히 우리들 삶의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일까? 필자의 소견으로는 명절이 현대인들에게 일상의 쳇바퀴에서 벗어나 새삼 가족의 정을 확인하고 위안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즉 가족 간의 정을 돈독히 하고 잠시나마 지루한 일상에서 벗어나 기분전환을 할 수 있게 하는 것이 바로 ‘명절’의 순기능인 것이다. 하지만 명절이 꼭 순기능만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많은 이들이 알고 있을 것이다. 의료계에 몸담고 있는 필자만 해도 그간 명절이 상당한 스트레스의 요인이 될 수도 있음을 명절 전후에 많이 관찰한 바 있다. 이른바 ‘명절증후군’이 바로 그것이다.
명절증후군은 명절과 관련하여 심한 부담감 및 피로감을 느끼게 되고 이로 인해 두통, 어지럼증, 소화불량, 복통 등의 다양한 신체적 증상이 생기는 일종의 스트레스성 증후군이라 할 수 있다. 주로 주부들에게서 많이 발생하며 심하면 우울증까지 불러올 수 있기에 소홀히 생각해서는 안 된다.
주부들이 명절에 압박감을 느끼는 이유는 단순히 강도 높은 가사노동 때문만은 아니다. 명절증후군을 호소하는 많은 주부들은 가족들이 가사 일을 주부가 당연히 해야 하는 일로 여기고, 자신의 가치를 인정해주지 않는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고 말한다. 이 때문에 일을 하는 것이 신나지도 않을뿐더러 억울한 마음까지 든다고 한다. 이처럼 명절을 즐겁게 보내기 위해 가장 애를 썼을 주부가 행복감을 느끼지 못했다면 다른 가족들 역시 진정한 명절을 보냈다고 하기에는 당연히 무리가 있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명절증후군의 예방법을 찾을 수 있다. 바로 같은 일을 하더라도 가족 구성원이 함께 참여하고 서로의 입장을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된다면 힘겨운 일조차 너끈히 해낼 수 있다.
또 명절을 별다른 긴장 없이 순조롭게 잘 보내는 가족들을 보면 대체로 평소에 의사소통이 원활한 가정임을 알 수 있다. 이를 감안해 명절 때 마다 후유증을 경험하는 가족이라면 평소 가정 내 의사소통 과정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닌지 가족간의 관계를 되짚어 봐야 할 것이다.
그리고 명절 스트레스가 단지 주부들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도 꼭 명심해 두어야 한다. 자식들이 찾아오면 잘 차려 먹이고 듬뿍 싸서 챙겨주고 싶은 마음이 앞서지만 어려운 형편에 내색조차 못하시는 어르신들도 상당한 명절 스트레스를 받는다. 또 당당한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으나 얇은 주머니 사정에 위축되는 가장들, 명절 스트레스에 힘겨워하는 아내를 보면서도 막상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초조해하는 남편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쏟아지는 수많은 걱정과 질문공세를 받아야 하는 실업자 등 우리 사회의 수많은 구성원이 명절 증후군의 피해자다.
부모, 가장, 주부, 자녀 등의 정해진 틀에 맞추어 서로의 역할만 일방적으로 기대하고 요구하다 보면 그 과정에서 소외되는 사람이 생기고 감정의 골이 깊어져 가정불화로 이어질 수도 있다.
앞으로는 보다 진정한 명절이 될 수 있도록 가족 구성원 모두가 정해진 절차와 형식에 지나치게 얽매이지 말고 다른 구성원의 입장을 생각하며 서로의 역할에 대해 진심으로 고마워할 줄 알아야 할 것이다.
아울러 따뜻한 말로 서로를 격려해주고, 가정사에 가족 구성원 모두가 즐겁게 참여한다면 ‘명절 증후군’이라는 고질적인 먹구름도 쉽게 걷혀지리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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