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수 교수 부산외국어대 인도학부

가치가 있는 모든 생각과 삶을 존중하는 것이 우리가 지향해야하는 세상
우리가 사는 현대 사회를 단적으로 말 할 수 있다면 어느 것이 가장 좋을까? ‘사진 이미지를 이해하지 못 하는 사람이 문맹인 사회’ 아닐까? 우리는 아침에 눈 뜨고 밤에 눈 감을 때까지 하루에 과연 몇 번이나 사진 이미지를 마주칠까? 그 복제된 이미지를 말이다.
토끼전 이야기를 잠깐 해보자. 자라의 꼬임에 속아 용궁에 간 토끼는 뭐 하는 짐승이냐는 용왕의 물음에 땅에서 사는 짐승이라 대답했을 것인데, 그 용왕은 땅이라는 걸 이해할 수 있었을까? 아무리 설명해도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물이 없는 세상을 경험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미지의 홍수라는 물에 사는 물고기다. 이미지는 이미 실재를 압도하다 못해 그 이미지가 새로운 실재를 만들어버리는데 사람들이 단지 무감각할 뿐이다. 그야말로 눈 먼 자들의 세계다.
현대 사회는 기술의 혁신으로 말미암아 소비자는 더 편리하고 새로운 것을 선호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하나의 사물이 이미지로 만들어지고, 그 이미지는 다시 사물을 규정하고 평가하게 된다. 아무런 본질과 존재의 성격을 갖지 못하는 이미지가 본질과 존재의 성격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 과정 속에서 사물은 하나의 기호이기 때문에 소비의 개념도 역시 그 기호 체계 안에서만 이해된다. 따라서 생산자는 소비자가 실제 생활에서 필요로 하는 물건을 만들어내는 대신 소비자들의 욕망을 자극하는 물건을 만들어낼 뿐이다. 결국 소비자는 물건 대신 기호를 욕망하고, 기호를 소비하게 되고 그럴수록 이미지의 비중은 커져만 가는 사회화가 진행된다.
그러다 보니 원래는 무의미해야 하는 그 이미지에 대한 평가가 매우 중요하게 작동한다. 이미지가 좋고 안 좋고, 사진이 잘 나왔고, 못 나왔고 와 같은 평가가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 사진을 찍는다는 것도 그렇다. 갤러리나 미술관에서 전시되고 팔리거나, 작품성을 인정받아 상을 받는다거나, 시대를 증거 하는 사진 책으로 나온다거나 하는 방식으로만 소비되어서 그렇다.
그런 소비의 방식도 존재 가치가 있는 중요한 하나이지만, 그보다 더 의미 있는 것은 사진을 하나의 언어로 이해하여 그것으로 뭔가를 이야기 하는 것과 그 이야기를 다른 사람과 서로 나눠 보는 것이 아닐까 한다.
서로 다른 사람이 같은 대상을 바라볼 때 같은 느낌을 갖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그것은 대상에게 부여되는 의미라는 것이 그것을 대하는 주체가 갖는 인식의 정도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모든 주체는 지나온 시간과 거쳐 온 환경이 모두 다르기 때문에 그 각각이 갖는 인식은 다 다를 수밖에 없다. 그래서 대상은 그것을 보는 사람마다 다르게 나타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 사진을 찍는 기술이 전문가 수준까지 미치지 못하다 보니 자기가 보고 느끼고 생각하는 대로 재현을 하지 못하여 찍는 사람들이 얼추 다 비슷한 사진으로 나타날 수는 있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즉 사진 이미지가 거의 같다고 해서 그 대상을 대하는 인식조차 같다고는 할 수 없다.
글을 자신이 말하고 싶은 생각대로 잘 쓰지 못하고, 그림을 잘 그리지 못하고 사진을 잘 찍지 못한다해서 자기가 갖는 생각마저 일반성으로 보편화 시키고 천편일률적인 것으로 만들지 말자는 말이다. 그냥 편하게 이야기를 나눠 보자. ‘이 장면을 대할 때, 난 이렇게 보았다’, ‘이 사진을 보니 이런 저런 생각이 든다’라는 것을 서로 이야기 나눠 보자는 것이다. 이것이 내가 말하는 인문학적 삶이다. 사진을 가지고 하는 인문학적 삶 말이다.
삶이라는 것도 마찬가지 아닐까. 어떤 삶이 옳고 어떤 삶이 그르다고 단언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단지 말할 수 있는 것은 ‘나 자신은 이런 삶을 존중하고, 이렇게 살고자 한다’ 정도라고나 할까. 누구의 삶이 화려하고, 누가 유명하고, 존경을 받는 그 삶이 옳은 것은 아니다. 사람은 각자 자신에게 처한 환경이 있고, 그 환경에 따라 그 속에서 살 수밖에 없다. 그것을 극복한 삶도 의미가 있지만, 굳이 극복하지 못하고 그 안에서 살아온 삶도 의미가 있는 것이다.
시간이라는 관점을 통해 볼 때 낮의 시간은 존재를 드러내주어 좋지만, 밤의 시간은 그것을 감추어 좋다. 드러내는 것은 분석하게 하지만, 감추는 것은 통찰하게 하지 않는가? 그래서 맑은 날은 맑은 날로 좋고 흐린 날은 흐린 날로 좋다. 다른 이에게 위해를 가하거나, 사회적으로 용납할 수 없는 죄를 짓지 않았다면 이런 삶도 이해의 대상이 되어야 하고, 저런 삶도 이해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어떤 삶 전체를 놓고 봐도 그렇다. 물 흐르듯, 바위를 만나면 굽어 가기도 하고, 경사가 있는 곳에서는 쏜살같이 달리기도 하지만, 너른 들판에 와서는 가는 듯 안 가는 듯 하기도 한다.
삶을 살다보면, 흔히 말하듯 항상 처음처럼 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초지가 반드시 일관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다 라고 본다. 누구든 자신의 지나온 삶을 돌이켜보면, 부끄러운 것도 있고, 보여주고 싶지 않은 것도 있고, 자랑하고 싶은 것도 있다. 그 어떤 삶도 가치 없는 것은 없다. 피라고 이름 붙여 뽑아버리는 것은 벼라고 하는 것이 인간의 목적에 유용하게 쓰이기 때문이지, 그 피가 본질적으로 벼에 비해 필요가 없는 존재는 아니잖은가. 모든 이의 삶이 다 그렇다.
사회와 불화한 삶, 가정과 불화한 삶, 자본과 불화한 삶, 모든 불화의 삶도 그에게는 무한한 가치가 있다. 가치가 있는 모든 생각과 삶 그것을 듣고, 말하고, 나누고 싶었다. 그것이야말로 사람이 사람을 존중하는 것이고, 그런 세상이 바로 우리가 지향해야 하는 세상이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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