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가 살아 있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
정의가 살아 있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
  • 정태영 기자
  • 승인 2016.06.29
  • 호수 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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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담이나 격언이라는 건 대부분이 기존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고안된 지혜다. 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많은 속담은 처세술이자 봉건적 생활 방편이다. 옳고 그름의 문제도 아니요, 당위의 문제도 아니다. 그래서 난, 속담이나 격언에 따라 살고자 하지 않는다. 때로는 그 반대로 살고자 하기도 하고, 때로는 달리 해석을 해서 살기 위해 노력한다. 죄를 미워해야지 사람을 미워하면 안 된다는 말에 대해 한 번 생각해 보자. 진정 죄를 지은 사람을 미워해서는 아니 될까? 그 죄가 도대체 어디에서 난 것이기에 그런 말을 한다는 말인가? 난, 죄와 사람 둘 다 미워한다. 사람이 행위의 주체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 행위의 주체를 미워하지 않고, 그에게 책임을 지우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은 죄를 짓고, 또 짓고, 또 짓는 것이다. 나 스스로를 바꾸지 않으면 세상을 바꾸지 못한다는 말에 대해서도 한 번 생각해 보자. 이것은 나 스스로를 바꾸는 것이 출발선이지 도착점이 아니라는 의미로 해석을 한다. 나 스스로를 바꾼다는 것은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은 아니라는 것이다. 나를 바꾸는 데 머무르지 말고, 그로부터 나아가 세상을 바꾸는 데 힘을 써야 한다는 말로 품고 산다. 작은 일에 최선을 다하고 정성을 쏟아야 세상이 바뀐다는 것도 마찬가지다. 작은 데 대한 최선이 바탕이라는 것이지 목표라는 의미는 아니다. 그런데 사회에서 영향력을 가진 많은 스승들이 전자만 강조하고 후자는 언급하지 않는다. 그것은 잘못된 태도다. 세상을 바꾸지 않고 나 혼자 깨끗해 질 수 있는 사회란 존재하지 않는다.

좋은 세상, 사람과 더불어 함께 가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반드시 계산을 해주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용서하는 것이 도덕이고 참 종교인 사회에서는 정의가 설 수 없다. 정의가 서지 못한다는 건 불의가 판을 친다는 것이다. 정의가 서지 않으면 약육강식의 세계가 되고, 그 약육강식의 세계에서는 힘 있고, 돈 있고, 많이 배운 자만 제대로 산다. 못 배우고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은 작은 물고기가 큰 물고기에 잡아먹히듯 살 수밖에 없다. 결국 용서란 본의 아니게 불의의 세상을 조장하는 것이 될 수 있다. 내가 지금 한국 사회에서 널리 믿는 ‘구원’ 중심의 기독교를 탐탁지 않게 여기는 것은 그들이 정의를 주장하는 예수를 감추고 용서를 주장하는 바울만 섬기기 때문이다. 내가 말하는 계산은 복수가 아니다. 친 딸을 성폭행한 친부를 어찌 해야 하느냐고 상담한 여성에게 어떤 중은 용서하라고 했다. 그건 용서가 아니다. 불의에 굴복하는 것이다. 인간이 저지른 죄, 인간이 계산하는 것이 옳다고 해야 한다. 기독교고 불교고 모든 종교의 용서론은 역사의 마약이다. 인간이라 차마 부를 수 없는 자에게 ‘쓰레기’라고 욕하는 것이 예의에 어긋나는 일이라고 비판하는 사람은 결국 봉건적 질서에 대해 예의를 갖출 뿐, 인간에 대한 보편 예의를 갖추지 못하는 것이다. 그것은 세상을 짐승이 사는 소굴로 만드는 일에 부역하는 거다. 순종이란 약육강식의 세상을 만들어가는 아편이다.

세계를 둘로 나누고, 그 가운데 뭐는 옳고, 뭐는 그르다는 세계관이나 문화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예의를 자기 방식대로 규정해놓고 그 규정된 예의를 따르는 것은 문명이고, 자기네가 정한 그 예의를 따르지 않는 것은 야만으로 보는 세계관, 그 전통적 규범을 난, 따르지 않는다. 여러 길과 방편을 인정하지 않고 오직 이 길, 이 말씀만 옳다고 생각하는 것 그런 세계관에 난 동조할 수 없다. 뭐든 증거하고, 통계 내고, 판단하는 과학적 삶의 태도도 마찬가지다. 내가 옳고 네가 그른 세상은 싸움을 잉태하는 세상이다. 내가 옳지만 너도 그 상황에서는 옳을 수도 있겠다, 라고 이해해 주고, 그 감정을 받아주는 데서 싸움은 그칠 수 있다. 싸움이라고 말하지만, 그 정도가 심해지면 그것은 분쟁이 되기도 하고 테러가 되기도 하며 학살이 되기도 한다. 인종 청소가 되기도 한다. 난, 그런 것이 일어나지 않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 좀 가난하고, 불편하고, 효율이 적더라도 남의 사정을 배려해주는, 남과 함께 가는 그런 세상을 살고 싶다. 잘못한 자는 처벌 받고, 그 처벌을 받은 후에 용서해주는 그런 사회가 되었으면 한다. 정의가 살아 있는 그런 세상에서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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