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제성장 일변도의 정책에 경종을 울리고, 근로자 건강관리의 중요성을 깨닫게 해주었던 ‘원진레이온 사태’를 되짚어 보고 이를 통해 향후 발전방안을 모색해보는 자리가 열렸다.
한국산업안전보건공단 산업안전보건연구원은 19일 서울 중구에 소재한 상공회의소에서 ‘제18회 산업안전보건 정책포럼’을 개최했다.
포럼은 ‘원진레이온 이황화탄소 중독발생 20년을 되돌아보며’라는 주제로 열렸으며 산업안전보건연구원 강성규 원장, 노동부 정진우 과장, 원진녹색병원 양길승 병원장, 한국노총 정영숙 본부장 등 산업보건관련 주요인사 30여명이 참석했다.
특히 이번 포럼은 원진레이온 사태가 우리나라 직업병 연구의 발단이 됐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것을 반영하듯 산·학·연 산업보건관계자는 물론 일반인들도 대거 참석, 총 300여명의 청중으로 북적였다.
◇ 맹목적 경제성장이 불러온 폐해
포럼에서는 ‘무엇이 문제였나’라는 주제를 가지고 각 발표자들이 ‘원진레이온 이황화탄소 중독 발생 사고’의 사고 일지와 당시 상황을 설명하는 자리를 가졌다.
발표자들에 따르면 이황화탄소는 불쾌한 냄새가 나는 무색 또는 담황색의 액체로 1800년대부터 락커 용제, 피라핀 및 유제 정련제, 비스코스 레이온 고무 생산등에 원료로 사용됐다. 이후 1900년대 들어 레이온 섬유의 수요가 높아짐에 따라 이황화탄소의 사용량도 전세계적으로 증가했다.
하지만 유럽과 일본 등 선진국들은 말초신경계질환자, 허열성 심장질환자 등 이황화탄소 중독 환자의 발생이 빈발하자 그 생산을 중단하고 시설 전반을 개발도상국으로 옮겼다. 우리나라 역시 1960년대 일본으로부터 레이온 섬유 관련 시설을 들여왔다. 당시 이같은 일본의 시설을 도입한 곳이 바로 경기도 미금시에 위치한 원진레이온(당시 회사명 흥한화학섬유)이었다.
이처럼 잠재위험을 덮어두고 경제성장에 눈이 멀어 들여왔던 레이온 섬유 설비의 위험성은 1981년 그 폐해를 드러냈다.
이곳에서 레이온 실을 기계에 거는 작업을 하던 홍원표씨가 작업 중 건강 이상을 느껴 국립의료원에서 치료를 받으면서 세상에 이황화탄소 중독의 위험성이밝혀진 것. 홍 씨는 이황화탄소 중독으로 인해 언어장애, 팔다리 마비 등의 증상이 나타났다. 이후 원진레이온에서는 1990년대 초반까지 다수의 사망자와 수백명의 중독자·중독기준의심자가 발생했다.
◇ “새로운 산업보건 목표 있어야”
포럼에서는 당시 정부와 산업안전보건 산·학·연 분야에서 적절한 대처를 하지 못했다는 반성도 잇따랐다. 원진레이온 직업병 문제는 산업보건 제도와 운영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발생했으며, 당시 학계 등이 산업보건제도 운영의 주체이면서도 사회의 구조적인 틀에 막혀 그 역할을 다 못했다는 것이 이들의 의견이었다.
이와 함께 참석자들은 사태의 의미를 되새겨 앞으로 근로자 보건분야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해 보자는 다짐도 했다.
고려대 의과대학 이은일 교수는 “당시학계 등은 군사정부와 사측의 압력에 밀려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하지 못하고, 제도권에서의 역할에만 순응했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이런 틀을 벗어나 포괄적인 의미에서 접근했었더라면 투쟁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도 충분한 사전 조치를 할 수 있었을 것이란 아쉬움이 든다”고 덧붙였다.
또 원진녹색병원 양길승 원장은 “원진레이온 사태로 인해 전국적으로 안전보건활동이 활발해지는 등 직업병과 산재문제가 사회적 의제로 나올 수 있었다”라며 “현 시점에서 변화를 위해 직업병 예방 종합대책을 마련하는 등 새로운 목표를 세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에 노동부 건강보호과 정진우 과장은 “과거에는 산업보건에서 직업병 예방이 가장 커다란 과제였지만, 앞으로는 이뿐만 아니라 작업관련성 질환 예방, 근로자 건강증진에도 노사정 모두 많은 정책적·실체적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