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례1. 둥근 회전톱날에서 작업을 하는 경우 절대 목장갑을 껴서는 안된다. 톱날에 목장갑이 끼일 경우 대형사고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체험 삶의 현장’이라는 프로그램에서는 이 모습이 시청자들에게 고스란히 전달됐다.
사례2. 방송인 정모양은 방송 중 아나콘다에게 물려 중상을 당했다. 제작진들은 흥미를 위해 아나콘다를 수일간 굶기고 촬영했으며, 아무런 보호장비 없이 정모양의 손을 아나콘다의 입에 집어넣게 하는 등 무리한 촬영을 진행한 것으로 밝혀졌다.
방송매체의 영향성은 다른 어떤 매체보다 크다. 우리나라의 세대수가 1800만가구이며, 대부분의 가구에 TV수신기가 있다고 가정해볼 때, 시청률 10%는 180만가구가 시청을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한 가구에 3명의 식구가 살고 있을 경우를 가정해보면 500만명 이상이 해당 프로그램을 시청하는 셈이 된다.
이렇게 불특정 다수의 인원이 시청하고 있는 TV프로그램에서 안전보건 의식이 결여되거나 위험한 장면들이 여과되지 않고 그대로 반영된다면 그에 따르는 악영향은 불가피할 수밖에 없다. 심지어 잘못된 안전보건 정보를 전해줄 경우 이를 시청하는 국민들의 안전의식에 큰 혼란을 초래할 수 있게 된다.
최근 한국산업안전보건공단연구원과 한국노총, 방송모니터링위원회 등은 이러한 우리나라 방송의 문제점들을 파헤쳐보기 위한 연구를 진행했고, 이번에 그 결과를 발표했다. 이번 연구는 방송의 안전보건의식을 다룬 첫 번째 연구였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직업소재 프로그램, 산안법 위반사례 다수 방영
긴 사다리에 올라타 밑부분만을 움직여가며 이동하는 모습, 그리고 배달의 달인이라 불리며 밥과 반찬이 담긴 쟁반을 겹겹이 쌓아올리고 한손으로 배달하는 모습.
이는 국민들의 눈에는 신기하게만 보일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안전 측면에서 분명 문제가 있는 모습이다.
최근 안전보건 전문가로 구성된 ‘방송모니터링위원회’는 우리나라 방송 프로그램의 안전보건 위반사항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하여 발표한 바 있다.
이에 따르면 산업안전보건법을 위반한 사례는 총 61회였다. ‘체험 삶의 현장’, ‘극한직업’ ‘생활의 달인’ 등 직업을 소재로 하는 프로그램에서 위반사례가 주로 발생했다. 이 중 개인 보호구 위반 사례가 25건으로 가장 많았고, 중량물 취급방법 위반 15건, 근골격계부담작업 기준 위반 10건, 기타 산업안전보건법 위반 11건 등이 뒤를 이었다. 이외에도 ‘1박 2일’, ‘무한도전’ 등의 연예프로그램에서도 산안법 위반은 아니지만 위험한 행동이 여러차례 화면을 통해 방송된 것으로 분석됐다.
방송모니터링위원회의 한 관계자는 “이는 모니터링 상에서 보여지는 것만 분석한 것으로 실제로는 이보다 더 많은 위반사례가 있었을 것이라 판단된다”라며 “특히 흥미를 위해 위험한 상황을 일부러 연출하는 모습도 많이 볼 수 있었다”라고 지적했다.
◇조기안전교육 차원에서 큰 문제점 제기

TV 프로그램을 보다보면 주요 장면들은 시청자들의 머릿속에 남게 된다. 그리고 ‘거울 효과(호감을 느끼는 사람의 행동을 무의식적으로 따라하는 심리)’에 따라 그 장면은 자연스럽게 행동으로 나타나게 된다.
특히 어린이와 청소년들의 경우 TV에서 나온 행동들을 의식적으로 모방하는 경우가 많다. 이 경우에는 조기안전교육 차원에서 큰 문제가 될 수 있다. 이것이 방송상에서 안전보건을 중시해야 하는 가장 큰 이유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안전보건의식 차원에서의 문제점은 설문조사 결과에서도 드러난다.
시청자 936명을 대상으로 ‘즐겨보는 TV프로그램에서 사고위험이나 불안한 내용을 보았거나 느낀적이 있는가’에 대해 조사한 결과, 59.6%인 556명이 ‘있다’라고 응답했다. 이 항목에서는 자녀를 둔 부모가 자녀가 없는 부모에 비해 약 18% 이상 위험성을 많이 인지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연령별로 보면 10대(44.4%) 보다 20대 이상(20대 50.7%, 30대 64.4%, 40대 72.4%, 50대 69.7%, 60대 이상 78.6%)에서 안전사고의 위험도를 인지하고 있다는 응답이 많았다.
또 시청자들에게 ‘어린이나 청소년의 의식수준에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하는가’라고 물어본 결과 전체의 69.8%가 그렇다고 대답했는데, 이 조사에서도 20대 이상에 비해 10대(41.4%)에서는 영향력을 다소 낮은 수준으로 느끼고 있었다.
한국산업안전보건공단 연구원의 한 관계자는 “연령대별로 보면 정신적으로 성숙되어감에 따라 방송의 위험성을 더욱 많이 느끼는 것으로 나타났는데, 이는 바꾸어 생각해보면 연령대가 낮을수록 무의식 중에 방송을 모방할 수 있다는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라고 밝혔다.
한편 시청자들을 대상으로 ‘시청 중에 느낀 안전상의 위험성’에 대해 조사한 결과, ‘흥미를 위해 의도적으로 위험한 장면을 연출한 것’에 대한 답변이 38.1%로 가장 높게 나타났다. 이 외에는 과도한 신체의 사용(24.6%), 기본적인 안전조치 미비 및 보호장구 미착용(22.5%), 열악한 환경(13.4%)의 순으로 나타났다.
‘방송에서 안전을 위한 조치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프로그램 안전보건 제작 지침 마련’ 42.7%, ‘프로그램의 심의강화’ 29.5%, ‘스태프에 대한 안전교육 실시’ 22.2% 등의 순으로 나타났다.
◇보조출연자 ‘사고경험 64%, 안전조치 없었다 70%’
방송의 폐해는 이뿐만이 아니다. 몇 년 전 드라마 ‘태왕사신기’ 촬영 도중 배모씨가 말에서 떨어져 뼈가 부러졌고, 2009년 10월 KBS ‘출발 드림팀 시즌Ⅱ’에서는 인기가수 조모씨가 촬영 중 발목 골절상을 입어 세 차례의 수술을 받기도 했다. 또 2005년에는 개그맨 김모씨가 말뚝박기 게임 중 인대가 끊어지는 중상을 당해 활동을 1년간 중단하기도 했다.
이처럼 연예인 또는 스텝들의 안전을 고려하지 않아 방송 제작 단계에서 안전사고가 발생하는 경우도 많다. 이런 문제점은 최근 프로그램들이 흥미와 자극성 위주로 가면서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이번 연구에서는 방송에 출연중인 보조출연자 183명을 대상으로 ‘방송 제작상 안전조치’에 대해 조사하기도 했다. 공단 연구원은 보조 출연자들의 경우 주요 출연자들에 비해 안전예방조치가 미흡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설문조사 대상으로 선정했다고 밝혔다.
먼저 ‘사고 위험을 인지한 적이 있나’라는 질문에서는 183명 중 138명(75.4%)이 ‘있다’라고 답했다. 사고 위험을 많이 인지하고 있는 만큼 실제 사고를 당했다는 답변도 63.9%로 매우 많았다. 세부적으로 보면 1년 미만 45.4%, 1~3년 86.2%, 3~5년 90.5%, 5~10년 91.7%, 10년 이상 100% 등으로 경력이 많을수록 사고를 당했다는 비율이 높았다.
아울러 프로그램 제작 과정에서 안전을 위한 조치나 교육이 있었는지를 물어본 결과, ‘없다’가 70.5%, ‘있다’가 8.7%, ‘모르겠다’가 20.8%로 나타났다. 또 응답자의 67.8%에 해당하는 124명이 사고 예방에 필요한 개인보호구를 지급받아 본적이 없다고 응답했다. 이들 항목에서 볼 때 방송제작 시 예방조치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평소 방송 제작 시 느끼는 위험의 종류로는 추락 71명, 전기위험 12명, 화학물질위험 26명, 화재 29명, 동물관련 위험 27명, 타박상 등 신체부상위험 133명, 기타 25명 등으로 나타났다. 보조출연자가 많이 참여하는 사극 드라마 제작의 경우 깊은 산속 등 외진 곳에서 촬영이 이루어지며 전투신 등 과도한 신체활동이 요구되는 장면이 많아 신체부상위험이 높은 것으로 분석된다.
아울러 제작진에 대한 사고예방 교육의 필요성에 대한 질문에서는 86.7%, 사전 절차나 안전매뉴얼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88.7% 등 절대다수가 ‘필요하다’라고 답했다. 또 사고예방을 위해 필요한 사항을 묻는 질문에서는 제작지침 및 매뉴얼 마련 47명(25.7%), 안전보건교육 69명(37.7%), 심의강화 26명(14.2%) 등의 순으로 답변했다.
이들을 종합해보면 보조출연자들은 안전을 위해 안전보건교육과 매뉴얼 제작의 필요성을 가장 많이 느끼고 있는 것으로 분석할 수 있다.
한편 보조출연자들의 경우 사전예방 측면에서도 문제가 있지만 사고 이후 대처방안에서도 크게 미흡한 것으로 조사됐다. 산재보험에 대한 인지여부를 확인해 본 결과 72%만이 ‘알고 있다’고 응답했으며, 실제 산재보험가입여부를 물어본 결과 5%만이 보험에 가입한 상태라고 답했다. 이처럼 산재보험가입률이 극히 낮은 이유는 보조출연자의 대부분이 시간제 일용직 혹은 기간 계약직 등 특수고용형태를 취하고 있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위험성 평가할 수 있는 기법 필요
방송심의에 관한 규정 제7조 제8항에는 ‘방송은 사회적으로 유익한 정보를 제공하고 국민문화생활의 질을 높이는데 이바지 하여야 한다’고 규정되어 있다. 또한 제13항에는 ‘방송은 노동의 가치와 직업의 존귀함을 존중하여야 한다’고 규정되어 있다.
그러나 안전보건과 관련해서는 특별한 규정이 없다보니, 위험한 장면이 여과없이 방송되더라도 제재할 수단이 없다는 것이 현재 방송계의 현실이다.
이와 관련해 무엇보다 방송통신심의위원회의 심의규정을 강화시키는 것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방송에서 흡연 장면이나 안전벨트 미착용 장면을 규제하듯이 안전보건에 대한 규제를 강화한다면 큰 효과를 볼 수 있다는 지적이다.
방송모니터링을 수시로 실시하고 있는 한국노총의 한 관계자는 “TV프로그램에 대해 안전보건 측면에서도 심의를 진행하고 위험요인이 발견될 경우 제재를 가하는 것이 필요하다”라며 “이를 위해서는 방송통신심의위원회 및 분과별 특별위원회의 위원으로 안전보건 관련 전문가를 위촉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라고 주장했다.
그 외에도 위의 설문조사 결과를 토대로 보면, 방송관계자들에 대한 안전교육과 제작 현장에 대한 안전점검을 실시하는 등 안전보건상 조치를 강화하고, 방송에 맞는 위험성평가 시트를 개발하여 방송 전 위험요인의 사전 차단과 방송 후 문제점에 대한 개선이 수시로 이뤄질 수 있게끔 하는 것도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또한 위험요인 보고시스템을 개발ㆍ운영하는 방안, 시민 옴부즈맨을 적극 활용하여 안전보건에 대한 모니터링을 강화하는 방안, EBS 등 공영방송의 역무에 산업안전교육 관련 방송업무를 추가시키는 방안 등 방송의 안전보건을 위한 여러 개선안도 생각해볼 수 있다.
한국산업안전보건공단 연구원의 한 관계자는 “우리나라의 경우 제작진 자체가 안전보건에 대한 의식수준이 낮고 이를 규제하거나 관리감독하는 조직도 미약하여 방송사고 위험이 매우 높은 실정”이라며 “이러한 위험요소가 포함된 프로그램을 사전에 파악하지 못하고 여과 없이 방송함으로써 시청자의 안전보건 의식에도 나쁜 영향을 미치고 있다”라고 전제했다.
이 관계자는 “방송에도 안전보건 문화를 정착시키기 위해서는 선진국과 마찬가지로 방송시스템에 적용할 수 있는 다양한 안전보건 모델과 평가기법을 개발하는 것이 시급하다”라고 덧붙여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