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공장 근무-백혈병 발병, 인과관계 인정
법원이 반도체 공장에서 일하다 백혈병으로 사망한 근로자 중 일부에 대해 산업재해로 인정하는 판결을 내렸다. 서울행정법원 행정14부(진창수 부장판사)는 23일 삼성반도체 직원과 유족 5명이 근로복지공단을 상대로 낸 유족급여 및 장의비 부지급처분 취소 청구 소송에서 숨진 황모씨와 이모씨 유족에 대해 산재로 인정, “유족급여 등 부지급처분을 취소하라”며 원고 승소 판결했다.
이번 판결은 반도체 사업장에서 일하다 백혈병에 걸려 사망한 근로자의 산재를 처음으로 인정한 판결이다. 또한 반도체 사업장의 작업환경과 백혈병 발병 사이의 인과관계를 인정한 첫 사례이기도 하다.
이날 재판부는 “명백히 밝혀지진 않았지만 황모씨와 이모씨에게서 나타난 백혈병은 사업장에서 근무하는 동안 각종 유해 화학물질과 미약한 전리 방사선에 지속적으로 노출돼 발병됐거나 적어도 발병이 촉진됐다고 추정할 수 있다”라며 “백혈병과 업무 사이에 인과관계가 있다고 봄이 상당하다”고 밝혔다.
또 재판부는 “산업안전보건연구원이 전체 반도체 사업장 근로자를 대상으로 림프 조혈계 암의 발생 위험이 일반인보다 높은지 조사한 결과를 보면 표준화 사망비나 암 등록비가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면서 “이 사실은 황씨와 이씨의 발병에 작업환경이 영향을 미쳤으리라는 추정을 뒷받침한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재판부는 다른 직원 2명과 유족 1명에 대해서는 “유해 화학물질에 지속적으로 노출돼 피해를 입었다고 보기 어렵다”며 인과관계를 인정하지 않았다. 이들 피해근로자는 디퓨전공정 세척 작업을 했던 황씨와 이씨와는 달리 절단·도금 공정 등 다른 업무를 맡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황씨 유족 등 5명은 “삼성반도체에서 근무하다 백혈병이 발병하여 산재 보상을 받아야 한다”면서 2007∼2008년 근로복지공단에 유족급여 등을 신청했다. 하지만 공단은 백혈병 발병과 삼성반도체 근무 사이의 인과관계가 인정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거부했고, 이들 유족은 지난해 1월 이에 불복하는 소송을 냈다.
노동계 일제히 환영
이번 법원의 판결을 바라 본 노동계는 직업병의 산재 인정 범위를 한결 넓게 해석할 길을 열어놓았다는 평가를 내리며 일제히 반기는 분위기다.
이번 소송을 주도한 반올림(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은 “이번 판결이 전자산업 피해 근로자들이 밖으로 나올 수 있도록 희망을 줄 것”이라고 밝혔다.
또 참여연대는 성명을 통해 “이번 판결을 계기로 근로자에게 부과되고 있는 인과관계 입증책임을 근로복지공단으로 변경하고 업무상 질병이 아니라는 명백한 반증이 없는 한 산업재해로 인정하도록 관련법을 개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민주당 이미경 의원은 “산재 인정의 폭을 넓힌 뜻 깊은 일”이라며 “앞으로 발암물질 사용을 보다 더 엄격히 규제해 근로자들의 건강권을 보호할 수 있도록 법을 개정해 나가겠다”고 강조했다.
삼성전자, 대응책 마련 고심
법원이 산업재해를 인정함에 따라 삼성전자는 대응책 마련에 고심을 하고 있다. 일단은 국외 연구기관이 실시한 반도체 근무환경에 대한 재조사 결과가 나오는 대로 다시 대응에 들어간다는 것이 삼성의 입장이다.
삼성전자는 지난해 7월 세계적인 안전보건 컨설팅회사인 인바이론 등에 조사를 의뢰한 바 있다. 조사결과는 다음날 중순경 나올 것으로 알려졌다.
삼성전자의 한 관계자는 “재조사에서 어떤 결과가 나오든 공개할 것”이라며 “이 결과를 바탕으로 항소 여부를 결정하겠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조사 결과 조금이라도 문제가 나타나면 직원 안전을 위해 모든 조치를 다하겠다는 게 삼성의 입장”이라고 덧붙였다.
고용노동부는 이번 판결과 관련해 신중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고용부는 근로복지공단의 판정 절차에 문제가 있었는지 등을 종합적으로 판단, 산재인정 범위 확대 여부 등을 결정하기로 했다.
고용부의 한 관계자는 “송부되는 판결문의 구체적인 내용을 확인한 후 대책 마련 여부를 검토하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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