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학의 향기 - 문득 나를 돌아보다
우리문학의 향기 - 문득 나를 돌아보다
  • 연슬기 기자
  • 승인 2011.07.20
  • 호수 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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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해 문전 골목 풀조차 안 베었더니 門巷年來草不除
조각구름 나무 하나 절간과 비슷하여라 片雲孤木似僧居
오랜 세월 맺힌 마음 다 녹아 사라지고 多生結習消磨盡
가슴 속엔 만권의 서책만이 남았노라 只有胸中萬卷書

- 유방선(柳方善 1388~1443)《태재집(泰齋集)》 (한국문집총간 8집) 

송나라의 문장가 장뢰는 “만물이 변화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재목을 이루지 못하고 사람이 어려움을 겪지 않으면 지혜가 밝아지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태재(泰齋) 유방선(柳方善)은 이 말의 본보기로 소개하여도 전혀 손색이 없는 분이다.

유방선은 사마시에 합격하여 태학에서 공부하던 중 가화(家禍)를 당하여 주로 경상도 영천(永川)에서 유배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그는 궁달(窮達)로 마음을 어지럽히지 않고 운수가 통태(通泰)하기를 바라는 뜻에서 태재(泰齋)라고 자호(自號)한 후 자신의 불우한 환경을 시로 삭히며 학문에 정진하였다.

이 시는 마흔 어름의 어느 봄날 유배지에서 지난 세월을 돌아보며 쓴 것이다. 풀, 구름, 나무와 같은 시어들이 기본적으로 고담(古淡)한 정서를 자아내는데다가 구절마다 정운(情韻)이 서린 시어들이 미묘한 함축미를 자아낸다.

첫 구의 ‘풀을 베지 않았다’는 것은 은자로서 바깥세상과 교통하지 않는다는 의미이고, 둘째 구절의 편운(片雲)이나 고목(孤木)은 저자 자신의 투영으로 당나라 시인 가도(賈島)의 <은자의 거처에 쓰다>란 시에서 유래한 말이다. 셋째 구절의 다생(多生)은 선악의 업(業)을 지으며 육도(六道)를 윤회하는 것을 뜻하고, 결습(結習)은 어떤 사물에 집착하여 생기는 번뇌와 습관을 아울러 이른 말이다.

특히 마지막 두 구는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긴 자의 자부심과 회한이 서려 있는 가운데, 봄날의 무상함도 언뜻 묻어 있어 독자들로 하여금 여러 번 되뇌게 한다. 호소력 있는 시적 메시지가 독자들의 공감을 사기에 충분한 내용인데다가 함축적인 시어의 행간에 여향이 감돌아 여운이 길게 남는다. 이런 것이 어쩌면 선자(選者)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조선시대의 이름난 시선집(詩選集)에 두루 선록된 이유는 아니었을지.

얼마 전 유방선 선생이 유배 후 거처했던 원주의 법천사지를 찾아가 본 적이 있다. 절터 아래편에 오래된 느티나무 한 그루가 눈에 뜨일 뿐, 인걸이 거처하던 장소는 흔적도 없었다. 두보의 시처럼 천추만세에 이름을 남긴다 하더라도 죽은 뒤의 일은 적막하기만 한 것이란 말인가! 사위를 두른 춘산의 봄빛은 다정하여 더 무상하고 그 사이로 천고의 바람만이 제 뜻대로 그저 제 갈 길을 가고 있을 뿐이다.

<자료제공 : 한국고전번역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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