立馬四顧, 不覺擧手加額曰: “好哭場! 可以哭矣!”
(입마사고, 불각거수가액왈: “호곡장! 가이곡의!”)<중략>
말을 멈추고 사방을 둘러보다가 나도 몰래 손을 이마에 얹고 말하였다.
“한바탕 울어보기에 좋은 곳이로다! 울어 볼 만허이!” <중략>
今臨遼野, 自此至山海關一千二百里, 四面都無一點山.
(금임료야, 자차지산해관일천이백리, 사면도무일점산.)
지금 요동벌에 임하였으니 여기서부터 산해관(山海關)까지 일천 이백 리 길은 사방에 전혀 한 점 산도 볼 수 없다.
乾端坤倪, 如 膠線縫, 古雨今雲, 只是蒼蒼, 可作一場.
(건단곤예, 여점교선봉, 고우금운, 지시창창, 가작일장.)
하늘가와 땅 끝을 마치 풀로 붙이고 실로 꿰매 놓은 듯한데, 예나 지금이나 그저 비와 구름만이 변함없이 오갈 뿐이니, 한바탕 울어볼만한 곳이라 하겠다.
박지원(朴趾源 1737~1805) <도강록(渡江錄) 7월 8일> 《열하일기(熱河日記)》
(입마사고, 불각거수가액왈: “호곡장! 가이곡의!”)<중략>
말을 멈추고 사방을 둘러보다가 나도 몰래 손을 이마에 얹고 말하였다.
“한바탕 울어보기에 좋은 곳이로다! 울어 볼 만허이!” <중략>
今臨遼野, 自此至山海關一千二百里, 四面都無一點山.
(금임료야, 자차지산해관일천이백리, 사면도무일점산.)
지금 요동벌에 임하였으니 여기서부터 산해관(山海關)까지 일천 이백 리 길은 사방에 전혀 한 점 산도 볼 수 없다.
乾端坤倪, 如 膠線縫, 古雨今雲, 只是蒼蒼, 可作一場.
(건단곤예, 여점교선봉, 고우금운, 지시창창, 가작일장.)
하늘가와 땅 끝을 마치 풀로 붙이고 실로 꿰매 놓은 듯한데, 예나 지금이나 그저 비와 구름만이 변함없이 오갈 뿐이니, 한바탕 울어볼만한 곳이라 하겠다.
박지원(朴趾源 1737~1805) <도강록(渡江錄) 7월 8일> 《열하일기(熱河日記)》
이 시는 1780년(정조4년) 음력 7월 8일, 무더위 속에 압록강을 지나 천산산맥(千山山脈)의 청석령(靑石嶺) 고개를 넘어 광활한 요동벌판을 대면한 44세의 박지원이 지은 것이다.
연암은 이 글에서 요동벌판 외에도 한바탕 울만한 곳으로 금강산 비로봉과 황해도 장연의 금사(金沙)를 꼽고 있다. 이 두 곳은 바로 동해와 서해를 굽어볼 수 있는 곳이다. 연암이 동해와 서해, 그리고 요동벌판 등과 같이 탁 트인 공간을 울만한 장소라고 말한 것에는 답답한 흉금을 한바탕 시원하게 풀고 싶다는 뜻이 담겨 있다.
연암은 자신의 울음에 대해 “캄캄한 어머니 뱃속에 있다가 처음으로 세상에 나온 아기가 갑갑한 마음이 풀어져 한바탕 울음을 터트리는 것과 같다”고 말하고 있다. 운다는 것이 꼭 슬픔에서 나오는 것만이 아니라 어떠한 감정이 극도에 달하면 그렇게 된다는 뜻이다.
연암을 그토록 답답하게 한 것과 통쾌한 울음으로 이끈 것은 도대체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열하일기》의 저작 동기에서 찾아볼 수 있다. 당시 중국은 명말의 혼란기를 극복하고 강희제의 태평을 누리고 있는 반면, 조선은 존화양이(尊華攘夷)의 춘추대의를 국시로 삼고, 임진왜란 때 입은 재조지은(再造之恩)을 갚는다며 명나라 신종(神宗)과 의종(毅宗)의 제사를 모시던 시절이다.
연암이 깊이 고민하고 있던 것이 바로 이같은 조선의 대외정책이었다. 이 문제의 본질이 지금 우리 시대에도 그대로 유효한 것이라는 점에 비춰보면 그의 식견이나 사유가 얼마나 깊었는지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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