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영훈 팀장 | 안전보건공단 제주지도원
존 스타인벡은 미국론이란 그의 저서에서 “미국사람들은 일생의 3분의1을 줄서서 기다리는데 낭비하는 바보들이다”라고 했다. 이 말은 약간 과장되어 있지만 그렇다고 반드시 틀린 말도 아니다. 미국인 생활조사에서 밝혀진 바에 따르면 미국사람들은 일생동안 평균 5년간을 줄서는데 소비하고 신호대기에 6개월을 낭비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자장면, 피자 등을 주문할 때 “빨리 갖다주세요”라는 말이 너무도 당연하게 일상화되어 있고, 약속장소에서 기다리다가 전화를 받으면 특별히 할 일도 없으면서 “빨리와”를 반복하는 한국인의 심성과는 대조된다. 외국인이 한국에 와서 가장 먼저 배우는 단어가 바로 이 “빨리빨리”라고 할 정도라고 한다.
물론 빨리빨리는 우리사회에 긍정적인 영향도 미쳐왔다. 한국전쟁 후 폐허가 된 잿더미 속에서 경제부흥을 일으키기 위한 촉진제 역할을 하면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몰두하는 한국인의 저력을 전 세계에 보여주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한국이 스마트폰 국가, 세계 일등 IT강국이 된 것에 이 “빨리빨리”가 어느 정도 기여했다는 점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무슨 일이건 빨리빨리 서두를수록 좋다고 생각하는 민족은 어쩌면 이 세상에서 우리뿐이 아닐까 싶다. 달음질을 빨리하는 것쯤은 기본이다. 밥도 빨리, 공부도 빨리, 돈도 빨리 벌고, 출세도 빨리하려 든다. 밥은 빨리 먹으면 체하고, 공부는 빨리하면 그만큼 빨리 잊어버리고, 돈을 빨리 벌면 그만큼 빨리 망할 수 있고, 출세를 빨리하면 그만큼 빨리 내려올 수 있는 것이다. 응분의 과정을 겪고 다지지 않으면 매사를 그르치는데도 일단 서두르고 보는 것이 고금에 불변한 한국인의 심성이다.
터키사람들이 하루에 가장 빈도 높게 쓰는 말이 ‘수아힐리’다. ‘천천히’란 뜻이다. 말끝마다 수아힐리, 수아힐리... 한다. 말끝마다 빨리빨리... 하는 우리와는 대조적이다. 오늘 할 일은 내일로 미루지 말라는 것이 우리의 격언인데 오늘 못하면 내일이 있지 않느냐는 것은 회교문화권의 격언이다.
인류학자 에드워드 홀은 텃세공학(Proxemics)이라는 학문분야를 개척한 인물인데, 그는 상대방과 마주보고 이야기 할 때 심리적으로 거리를 둔다고 했다. 그 4가지 쾌적거리로 △가족이나 애인사이에 많이 볼 수 있는 30cm내외의 거리인 친밀한 거리(Intimate Distance) △친구사이에 60~90cm 정도의 거리를 유지하는 사적인 거리(Personal Distance) △일반적으로 고객과 90~120cm 정도 거리를 두는 것을 말하는 사회적인 거리(Social Distance) △강의나 발표할 때 상대와 2m 정도 이격하는 거리를 두는 것을 말하는 공적인 거리(Public Distance)로 구분했다.
사람은 몸을 중심으로 보이지 않는 공간을 휴대하고 살고 있다. 그 공간 안에 다른 사람이나 물체가 들어오면 거부하거나 불쾌한 감정을 갖게 되는 텃세공간이 있다고 한다. 이러한 텃세공학을 이용하여 사람과 사람사이에 적절한 관계를 맺으려면 상대방에게 거부감을 주지 않을 정도의 최소한의 거리가 유지되어야 한다고 그는 강조했다.
산업현장에서도 마찬가지다. 안전공학을 측면에서 사람이 다치지 않으려면 신체의 일부가 위험한 곳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거리를 좁히거나, 충분히 멀리 떨어지도록 이격하는 안전거리(Safety Distance)를 설정하고 준수해야 한다. 급하게 서두르다 조심조심하지 않으면 안전거리가 상해거리가 되고 말 것이다.
사고가 자주 발생하는 근로자들은 잘하는 것이건 못하는 것이건 일단 서두르고 본다. 위험을 무릅쓰고 안전수칙을 어길수록 동료보다 더 일을 잘한다는 못난 우월감으로 가득차 있다. 위험의 정도가 클수록 작업이 빨라진다는 허황된 심리가 불행의 연속선을 그리고 있다. “조심해서 오세요”, “천천히 오세요”, “천천히 하세요”라고는 왜 말하지 못할까?
2010년 7월 1일 조심조심 코리아 전 국민 캠페인이 시작되었다. 1년 8개월은 심성을 개조하기에 턱없이 부족한 시간이다. 하지만 빨리빨리 심성이 예전보다 많이 수그러졌다는 것 만큼은 확실하며, 여기에는 조심조심 코리아 운동이 많은 기여를 했다고 판단된다. 왜 이리 늦게 시작되었는지 오히려 아쉬운 감이 있다.
이제라도 “수아힐리, 조심조심 코리아”가 한국인의 의식 깊은 곳에 자리 잡기를 바란다. 줄 서는데 5년간의 기간을 허비하는 바보들이 곧 미국인이라고 보도되었지만 기다림의 미학은 곧 안전으로 보답된다는 사실도 알아주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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