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광기연(주) 이계봉 대표

“여러 분야의 기계를 다뤄봤기 때문에 원리만 알면 3D로도 스케치가 가능합니다. 나름대로의 감각은 갖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고용노동부와 한국산업인력공단은 서광기연(주) 이계봉 대표이사를 이달의 기능한국인으로 선정했다. 이계봉 대표는 기계설계의 달인으로 불리며 업계에서 명성이 자자했다. 그런 그가 특히 주목 받게 된 계기는 후육관(두께 10~60mm, 길이 12~18m, 직경 400~1600mm, 무게 20t에 달하는 강관) 생산설비를 국산화시키고 나서부터다.
대부분의 후육관 제조설비는 대량생산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어 다품종 소량 생산에 치중하는 국내 업체에서는 애로가 많았다. 이 문제를 해결한 것이 바로 오늘의 주인공인 이계봉 대표다. 그가 이처럼 눈부신 성과를 거두기까지 걸어온 길을 되돌아봤다.
뜨거운 열정으로 일궈낸 기술력
1959년 경남 의령군의 작은 시골마을에서 3남 4녀 중 차남으로 태어난 이 대표. 어릴 때부터 그림 그리기와 수학을 좋아했던 그는 어려운 환경에서도 시간이 주어지는대로 공부를 했다.
“당시만 해도 농번기 때 학교를 간다는 것은 생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래도 저는 산수(수학) 수업이 있는 날에는 만사를 제쳐 놓고 학교에 갔습니다. 왠지 모르겠지만 어린 마음에도 산수만큼은 건너 뛰면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넉넉하지 못한 유년 생활을 보낸 이 대표는 동생들의 학비를 벌기 위해 실업계 고교에 진학하기로 결심한다. 그곳에서 그는 다른 분야보다 더 많은 흥미를 느낀 기계제도를 전공하게 된다. 노력 끝에 고교 재학시절 기계제도기능사 자격증을 취득해 취업에 성공했지만 현장은 만만치 않았다.
“설계의 기초는 제도입니다. 그런데 현장 실습을 나가 보니 제가 많이 부족하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그래서 야간 전문대학에 들어가 학업과 직장생활을 병행하며 공부를 더 했습니다”
야간 대학을 졸업한 후 이 대표는 기계설계를 제대로 해보겠다는 일념으로 산업기계 제조회사에 입사하게 된다. 이 시기에 그는 압력용기, 일반 산업기계, 화학플랜트의 설계제작, 설치, 시운전 등의 업무를 도맡았다. 그렇게 열정과 노력으로 한 분야에만 매달린 결과 그는 28세라는 젊은 나이에 부소장의 직위까지 오르게 된다.
“부소장이 되고 나서 한 달에 열흘 정도는 회사에서 잠을 잤죠. 새벽 2~3시까지 설계를 하고는 군용 야전침대에서 쪽잠을 자고 아침에는 세면장에서 씻고 다시 업무를 시작했습니다. 덕분에 일을 빨리 배울 수 있었고 혼자서 어려움을 해결하는 능력도 키울 수 있었습니다.”
어떤 어려움도 기술력 하나로 해쳐나가
그렇게 열과 성의를 다해서 일을 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다니던 회사가 경영난으로 문을 닫게 된다. 한 순간에 실업자 신세가 된 것이다. 하지만 그는 여기서 낙담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나만의 기술’이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그런 자신감을 바탕으로 그는 창업을 결심하게 된다.
사업은 번창했다. 창업한지 4년 만에 부산 다대공단에 공장을 갖추고 자동차 비석면 단열 가스켓(자동차용 보일러)을 개발하는 업체와 기계장치를 함께 개발해 큰 성과를 낼 정도였다. 남부럽지 않은 생활이 계속됐지만 그 역시 오랜기간 동안 지속되지는 못했다. 제품을 납품한 상태에서 발주 업체가 부도를 낸 것이다. 회사는 점점 어려워졌고 결국 정리할 수밖에 없었다.
“회사를 접긴했지만 그동안 저와 거래를 했던 분들이 일을 많이 맡기셨습니다. 차근차근 다시 시작한다는 마음가짐으로 더 신중하게 성능이 우수한 기계들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이렇게 다시 일어선 이 대표는 1999년 지금의 서광기연(주)을 설립하게 된다. 각종 유압 프레스류들을 개발·생산하기 시작한 그는 2005년부터 후육관 공정제조 일관설비 시스템 개발에 착수하게 된다. 지속적으로 연구개발에 매진한 결과 6년 만인 2011년 이 대표는 국내 최초로 후육관 제조시 12개 공정에 사용되는 모든 장비를 국산화하는데 성공하기에 이른다.
이를 통해 제품 가격과 납기는 기존에 비해 1/2~1/3로 줄어들었고, 생산성은 시간당 2~3배 높아졌다. 이계봉 대표는 이 같은 성과를 낼 수 있었던 가장 큰 원동력으로 회사 직원들을 꼽았다.
“저는 돈을 목표로 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저를 포함해 저와 같이 일하는 직원들 모두가 잘 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저는 직원들에게도 항상 이런 말을 합니다. 나는 시골의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무일푼으로 태어났다. 하지만 나만 잘되자고 욕심 부리지는 않겠다. 우리가 다 같이 잘 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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