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위, 고용노동부에 제도개선 권고
근로자가 인과관계 증명하기보다 사업주가 인과관계 없음을 증명해야 업무상 질병에 대한 입증 책임을 누구에게 두느냐는 논쟁이 다시 한 번 불거질 것으로 전망된다.
국가인권위원회는 19일 산업재해보상보험 제도의 ‘업무상 질병’과 관련한 인정기준을 개선할 것을 고용노동부 장관에게 권고했다고 밝혔다. 업무상 질병과 관련한 입증책임을 사업주 또는 국가가 져야 한다는 것이 주요 내용이다.
현행 제도는 △근로자가 유해·위험물질을 충분히 다룰 것 △유해·위험물질을 다룬 것 등이 질병을 유발할 수 있다고 인정될 것 △의학적 인과관계가 있을 것 등 3가지 요건을 모두 충족해야 ‘업무상 질병’으로 인정받을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이에 대해 인권위는 “고용노동부는 의학적 인과관계 등의 증명은 피해근로자가 아닌 근로복지공단이 부담하고 있다고 설명하지만, 요건 증명을 못했을 때의 피해는 고스란히 피해근로자에게 부담되고 있다는 점에서 실제 입증의 부담은 피해근로자에게 있다고 판단된다”라며 “피해근로자들은 질병에 걸린 사실과 유해·위험요인에 노출된 경력이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제기된 질병이 업무 관련성이 없다는 사실은 국가 및 사업주 등이 증명하도록 하는 등 입증 책임을 배분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권고했다.
질병과 업무사이에 인과관계가 없음을 사업주나 국가가 증명하지 못하면 업무상 질병으로 추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노동계와 경영계 입장 극명히 갈려
지난해부터 고용노동부는 근로자의 입증책임을 완화하고, 산재심사의 전문성을 강화하는 내용으로 제도개선을 추진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번 인권위의 권고는 이러한 정부의 움직임을 더욱 가속화시킬 것으로 전망된다.
하지만 변수는 남아 있다. 이에 대한 노동계와 경영계의 입장 차이가 극명하기 때문이다. 정부가 이들 모두를 어떻게 아우르느냐가 앞으로의 관건이 될 전망이다.
이번 권고에 대해 한국노총과 노동단체들은 절대적인 지지의사를 밝혔다. 한국노총의 한 관계자는 “그동안 사업주와의 사용종속 관계아래 산재의 입증책임까지 실질적으로 근로자에게 있으면서 산재요양을 신청한 근로자의 65%가 불승인되고 있는 상황”이라며 “이러한 불합리한 현실 속에서 산재보험의 공정성을 확보하기 위한 의미있는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을 것”이라며 인권위의 권고에 기대감을 나타냈다.
참여연대의 한 관계자는 “산업재해보상보험법 개정은 더이상 미룰 수 없는 사회적 의제”라며 “고용노동부와 19대 국회는 인권위가 권고한 내용으로 법개정을 즉시 추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경영계의 반발은 거세다. 사업주에 대한 입증책임이 현실성이 없다는 주장이다. 경총의 한 관계자는 “권리를 주장하는 자가 그 근거가 되는 사실에 대해 입증책임을 부담해야 하는 일반원리에 반대되는 내용”이라며 “근로자가 아닌 사업주가 업무와 질병사이에 인과관계가 없음을 반증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지적했다.
이 관계자는 “산재보험에서 입증책임이 전환된 입법례는 전세계적으로 찾아보기가 어렵다”라며 “스웨덴의 경우 1977년 인권위의 권고와 같은 내용으로 업무상재해인정기준을 개정했지만 업무상질병 승인자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사회적으로 감당할 수 없게 되자 결국 1993년 근로자가 입증책임을 지는 것으로 복귀한 사례가 있다”고 근거를 들었다.
이어 “현재 노·사·정 산재보험제도개선TF를 통해 업무상질병인정기준과 관련한 후속 논의가 진행되고 있는 상황 속에, 산재보험제도에 대해 전문성이 없는 인권위가 왈가왈부하는 것은 적절치 못하다”고 덧붙였다.
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 위원장은 민간인으로
한편 인권위는 업무상 질병의 구체적 인정기준을 산업구조의 변화 등을 반영해 정기적으로 보완하고, 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 위원장을 민간인으로 선임하도록 권고했다. 업무상질병 판정의 독립성·공정성·전문성을 강화시키기 위한 조치다.
또 사업주가 피해 근로자의 산재보험 급여신청을 방해하는 수단으로 악용돼 왔던 산재보험 급여신청서 상의 사업주 날인 제도도 폐지하도록 했다.
인권위는 “첨단 전자제조업과 서비스업의 확대라는 산업구조의 변화를 반영하고 노동인권을 보호하는 방향으로 산재보험 제도를 개선할 것을 권고했다”라며 “권고의 실효성을 확보하기 위해 향후 제도 개선에 관한 모니터링을 지속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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