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절룩거리는 다리와 굳은 팔을 갖고 있는 보험설계사가 있다. 사람들은 그에게 “성치 않은 몸으로 굳이 왜이 일을 택했냐?”고 묻는다. 이곳저곳을 다니며 많은사람을 만나야 하는 보험설계사 일을 불편한 몸으론 하기 힘들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런 걱정 섞인 물음에 그는 웃으며 답한다. “이런 몸이기 때문에 일부러 하는 것입니다. 전 보험 덕분에 큰 사고를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가정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 이때 받은 감사함을 알려 다른 많은 분들이 가정을 지키는데도움을 드리고 싶습니다”
이 보험설계사의 이름은 김윤중(42)이다. 산재의 역경을 딛고 행복을 전하는 보험설계사로 제2의 인생을열어가고 있는 그를 만나 이야기를 나눠봤다.
과로가 불러온 뇌출혈
1999년 3월, 김윤중씨는 서른을 갓 넘긴 나이에 국내 4대 거울업체 중 하나인 B거울회사의 영업소장이 됐다. 타고난 영업력과 활발한 대인관계로 유리업계에서 인정 받고 있던 그를 B거울회사에서 전격적으로 스카웃한 것이다. 젊은 그를 영업소장에 앉힐 만큼 회사의 기대는 상당했다. 때문에 그는 소장이라는 자부심을 누릴 틈도 없이 야근은 물론 주말까지 반납하며 일에 매달렸다. 당시 그의 주임무는 관할 구역의 대리점 업주를 관리하는 것이었다. 수많은 업주를 상대하다 보니 상당한 스트레스를 받는 것은 물론 술자리도 하루가 멀다하고 이어졌다.
그렇게 5년이 흐른 2004년 1월 15일. 그는 여느 날과 다를 바 없이 물건 발주량을 체크하며 하루를 시작하고 있었다. 그 때 갑작스런 현기증이 밀려왔고, 그는 힘없이 쓰러졌다.
“휠체어를 타느니 기어다니겠다”
뇌출혈이란 진단이 떨어졌다. 급히 수술이 이뤄졌지만 결과는 좋지 않았다. 왼쪽 편마비가 오고 만 것이다. 당시 그의 나이는 불과 서른여섯이었다.
“큰 애가 3살이었고 둘째가 1살이었습니다. 게다가 아내 배속엔 5개월 된 막내아기까지 있었지요. 아픈 아빠를 찾아온 아이들을 보면서 전 그저 눈물만 흘렸었습니다”
임신 중인 아내, 어린 자식들, 늙은 부모. 어깨가 무거운데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누워있는 것뿐이었다. 걱정에 걱정이 깊어지자 우울증까지 찾아왔다. 그러던 어느날 간이 침대에서 쪼그려 잠이 든 노모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부족한 아들 때문에 예순의 노모가 이런 고생을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부터 자리를 박차고 무작정 몸을 움직이는 연습을 시작했다. 무리한 운동을 걱정한 의사가 휠체어를 이용하라고 권고했지만 그는 휠체어를 이용하느니 기어서 다니겠다며 더욱 재활운동에만 매달렸다. 그렇게 1년이 가고 2년이 흘렀다. 완전히 나을 수는 없었지만 절뚝거리며 걸을 수 있게 됐다. 또 자유롭게 쓰진 못했지만 팔도 조금이나마 움직일 수 있게 됐다.
“포기는 할 수 있는 것을 다 해본 다음에 해도 늦지 않습니다. ‘진인사 대천명’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최선을 다하면 분명 하늘이 도와 줄 것입니다”
“나는 힘이 들 때 도와주는 사람”
몸 상태는 많이 좋아졌지만 마냥 기뻐할 수가 없었다. 대체 앞으로 무엇을 해서 가족을 부양해야 할지 막막했다. 그러던 차 그를 담당했던 A생명보험의 한 보험설계사가 그에게 조언을 했다. “당신은 보험을 들어서 가족을 지킬 수 있었고, 큰 도움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 기쁨을 다른 이들에게 나눠주는 일을 해보면 어떨까요?” 그는 이 말을 듣고 느낀 바가 컸다. 즉시 보험 관련 공부를 시작했고 이어 모 보험회사에 입사시험을 봤다. 그리고 2006년 2월 28일 산재를 종결, 퇴원한 후 바로 그 다음날부터 일을 시작했다.
현재 김윤중씨는 AIA생명 대전지점의 마스터 플래너로 활동을 하고 있다. 그간 간접 투자 상품 권유인 자격증, 종합재무설계사(AFPK) 자격증 등을 취득, 이제는 지역에서 손꼽히는 금융·보험 전문가가 됐다. 확실한 전문성이 뒷받침되어야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란 믿음에 늘 자기계발에 대한 의지를 불태우고 있다. 이외에도 그는 향후엔 어려운 이웃도 돕겠다는 마음으로 요양보호사자격까지 취득했을 정도다.
“고객들이 힘이 들 때 도움을 드릴 수 있는 보험설계사라서 행복합니다. 앞으로도 노력을 계속해서 제가 받은 사랑과 용기를 다시 세상 속에 베풀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