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부산의 모 병원 신축 공사현장 지하 3층. 당시 그곳에선 현장 근로자 200여명이 모인 가운데 안전강연이 열리고 있었다. 어느 현장에서나 흔히 열리는 안전교육이었지만 그날 이곳의 분위기는 일반적인 현장과는 달랐다. 근로자 모두가 경청을 하고 있는 것은 물론 심지어 눈물을 쏟아내는 이도 있었다.
이런 분위기가 조성된 것은 이날 생전 처음 강연을 맡은 산재근로자 박종균(46)씨 때문이었다. 그는 안전사고로 인해 장애인이 된 것은 물론 가정이 붕괴되는 슬픔도 겪었다. 다시 생각하는 것도 가슴이 미어지지만 자신과 같은 고통을 다른 근로자들이 겪게 하고 싶지 않아 자신의 이야기를 힘들 게 꺼내놓은 것이다.
이제는 아픔을 딛고 전국 곳곳 사업장에 안전을 전달하고 있는 그를 만나 이야기를 나눠봤다.
광산에서 천반 붕괴사고 나

1991년 10월 2일, 경북 봉화에 있는 Y광업소. 박종균 생산·안전담당자는 바쁜 걸음으로 갱내를 헤집고 다니고 있었다. 오늘 작업장에 배치된 신입 광부가 있어야 할 곳에 없어 그를 찾아 나선 것. 작업자를 찾아 갱내 이곳저곳을 헤매던 그는 엉뚱한 곳에서 작업을 하고 있던 신입 광부를 찾을 수 있었다.
그렇게 작업자를 제자리에 배치해 주고 돌아서던 찰라, 그는 귓전을 때리는 ‘우르릉’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 소리는 머리 위에 있던 천반(천장)이 무너져 내리는 소리였다. 약 30초의 시간이 지난 뒤 그는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하지만 그의 눈에 들어온 광경은 그를 아연실색케 했다. 족히 4~5톤은 나갈 듯 보이는 바위가 그를 짓누르고 있었던 것이었다.
점점 흐려지는 정신을 애써 붙잡았다. 자신이 아니고는 도저히 이 상황을 빠져나갈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마지막 힘을 짜내어 주변에 있던 광부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광부들은 그의 지시에 따라 바위를 치우고 그를 들 것에 실었다.
사고가 난 곳은 지하 840미터 지점. 신속한 사고 수습에도 불구하고 그가 인근 병원에 도착했을 때는 사고가 발생한지 5시간여가 지났을 무렵이었다.
의사는 그에게 출혈이 심한 데다 팔·다리와 오른쪽 갈비뼈 대부분이 부서져 오늘밤을 넘기기 힘들 것이라는 말을 전했다.
스물여덟, 하반신마비 환자가 되다
의사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그는 살아남았다. 하지만 남겨진 후유증상은 생명의 부지 자체를 의미 없게 만들었다. 척수손상으로 인해 하반신마비 장애인이 된 것. 28살의 청년이 감내하기에는 너무나 충격적인 결과였다. 게다가 그에게는 책임져야할 부인과 자식도 있었다.
수년 동안 전국의 유명 병원을 찾아다니며 치료를 받았지만 결국 모두 헛수고였고, 이 고난의 과정을 견디다 못한 그의 부인은 그에게 이혼을 요구했다. 그렇게 그는 사랑했던 부인과 자식들을 떠나보낼 수밖에 없었다.
안전사고로 인해 하반신마비장애인이라는 나락에 떨어졌는데 끝내 가정의 붕괴라는 나락의 나락에까지 떨어지고 만 것이다.
산재근로자들의 역량 강화 필요해
살아도 사는 것 같지 않은 날들이 이어졌다. 그가 그저 하는 일이라고는 PC통신상에서 비슷한 처지의 장애인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뿐이었다. 그러던 중 그는 장애인 동호회에서 사귄 한 친구로부터 자신의 집에 놀러오라는 초대를 받았다.
그렇게 방문한 친구의 집에서 그는 인생을 뒤바꿔 놓는 경험을 얻을 수 있었다. 경도의 장애인인줄 알았던 친구가 류마티스 관절염으로 인해 온 몸이 대부분 마비된 환자라는 것을 알게 된 것. 그 친구가 자유로이 움직일 수 있는 신체부위는 단지 양손의 집게손가락 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친구는 인터넷 채팅은 물론, 음원의 디지털 작업 등을 통해 상당한 수익까지 얻고 있었다.
친구의 집을 나서며 박종균씨는 자신을 반성하지 않을 수 없었다. 늘 하반신마미가 아니었더라면 ‘지금쯤 과장이 됐을 텐데’, ‘이혼을 당하지 않았을 텐데’하며 후회만 했었던 것이 부끄러웠다.
그날 이후 그의 삶은 180도 달라졌다. 각종 산재근로자 단체에 가입, 활발한 활동을 하기 시작했다. 또 자신과 같은 산재근로자가 발생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전국 현장을 돌며 안전강연도 펼쳤다.
현재 박종균씨는 이같은 산재근로자들의 권익증진을 위한 활동과 산재감소를 위한 활동은 물론, 우리사회에 도움을 줄 수 있는 활동에도 참여하고자 노력을 하고 있다. 이를 위해 몇해전 법학을 재전공한데 이어 최근엔 재활학 박사과정까지 밟고 있다.
산재의 아픔을 딛고 이제는 우리사회를 비추는 햇살이 되고자 노력하고 있는 박종균씨처럼 우리나라 사업장 구석구석에도 ‘안전’이라는 따스한 햇살이 어서 빨리 비추길 간절히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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